
2010년 부터 지난 7월 까지 12명 사망
검찰 “수사 중 이런 일 생겨 안타깝다”
[일요서울 | 이범희 기자] 불미스러운 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재계 인사가 자살을 시도하는 충격적인 일이 또 벌어졌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과 고 남상국 대우건설 전 사장에 이어 최근에는 윤의국 고려정보통신 회장이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과연 이들은 왜 죽음의 문턱에 서야 했던 것일까. 일부 언론은 이들의 자살사건과 검찰 수사의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지난 2일 경찰은 윤 회장이 이날 오전 11시 쯤 서울 반포대교 남단 지점에서 외투와 구두를 벗어 바닥에 놓은 채 한강으로 뛰어내렸다고 밝혔다.
이때 이 상황을 본 한 시민이 112에 신고했고, 마침 서울시에서 주최한 행사의 안전사고에 대비해 인근에 대기 중이던 구조선이 곧바로 출동해 윤 회장을 구조했다.
인근 병원으로 후송된 윤 회장은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외투 안에는 휴대전화와 신분증이 들어 있어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검찰은 윤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공급업체 ‘엘스트로’가 올해 초 KB국민은행의 인터넷 전자등기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는 과정에 특혜를 받은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현재까지 뚜렷한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윤 회장이 자살을 기도한 것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에 대한 수사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수사의 불똥이 KB로 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검찰이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과 관련한 비리를 다방면으로 캐는 과정에서 이번 일이 터진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2004년 3월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친형 건평 씨를 통한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고 공개한 직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자살했다.
남 사장은 11일 오후 12시50분께 서울 한남대교 남단에서 북단으로 400여m 떨어진 곳에서 부인 명의의 레간자 승용차에서 내려 한강에 투신했다.
남 전 사장은 인사 청탁 대가로 3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받던 상황이었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남 전 사장의 변호인은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인 오후 12시 9분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강모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남 전 사장이 오늘 대통령 회견을 듣다가 자신의 연임에 대한 청탁을 거부했다는 등의 내용을 듣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한강에서 자살하겠다며 전화가 왔었다”고 알려줬다.
강 검사는 남 전 사장의 변호인으로부터 이 같은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경찰청 상황실로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국민들의 뇌리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재계 인사의 투신 자살 사례는 2003년 8월 ‘대북 비밀송금사건’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현대 계동 사옥에서 투신자살한 고 정몽헌 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다. 이른 시간 사옥 주변에 쓰러진 모습을 직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검찰의 가혹수사 논란과 더불어 정치권에 책임공방까지 낳았던 이 사건은 정 전 회장이 자살 직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3000만 달러를 송금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사회 저명인사들의 자살은 주로 비리사건에 연루돼 검찰조사가 이뤄지던 중 발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 시 인사, 납품 비리로 검찰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남지사(2004년 4월), 관내 전문대학 설립과정의 뇌물수수 혐의를 받던 이준원 파주시장(2004년 6월) 등이 그들이다.
지난달 국정감사 기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이상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검찰로부터 받은 ‘검찰수사 중 자살 발생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검찰조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의자나 참고인은 55명에 이른다.
서울중앙지검에서 2010년부터 지난 7월까지 자살한 피의자가 12명(22%)으로 가장 많았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4명에 달했다.
죽음의 문턱에 서는 까닭?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검찰은 “조사 중 또 다시 일어난 갑작스러운 자살소동은 상당히 유감이라는 입장을 표하며 수사 도중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다. 검찰은 앞으로도 법과 원칙에 따라 절차대로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회장 사건과 관련해서도 검찰은 “윤 회장을 한 차례 소환 조사했지만 수사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수사 중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명인들이 검찰 수사를 전후해 죽음에 문턱에 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선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이나 뇌물수수 등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위 공직자나 기업체 간부들은 대부분 검찰 수사에 대한 압박감과 수치심 등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상민 의원은 “검찰 수사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들이 많다”며 “피의 사실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죄인 다루듯 강압적인 수사를 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발언과 태도는 철저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유명인의 죽음이 일반인의 자살로 이어지는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기도하는 현상)로 사회적 문제로 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극적인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한 대학 교수는 “유명인의 투신과 관련된 보도를 보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느낌이 있다”면서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살이라는 단어와 자살 원인을 기사의 제목으로 쓰지 않을 것 ▲자살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을 것 ▲구체적인 자살 방법에 대한 언급을 피할 것 ▲자살 원인을 구체적 조사 없이 단정적으로 하나만 명시하는 것을 피할 것 등의 보도준칙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