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권총·대담성에 혀 내둘렀다”

2006-11-01     정은혜 
강남 ‘권총강도’ 검거 풀스토리


최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권총강도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전말은 한 20대 후반의 남성이 특정고객만 관리하는 은행에 들어가 권총으로 지점장을 위협, 현금 1억 500만원을 챙겨 도주했다는 것. 범인이 흉기로 위협해 은행 일반창구를 터는 일반적인 뉴스와 달리, 실제 권총을 범행에 사용하고, 일부 VIP 고객들만 이용한다는 밀실을 범행 장소로 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충격 그 자체라는 지적이다. 특히 범인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사기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동종전과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 해외여행을 하며 버젓이 공항을 통해 귀국했던 것으로 드러나 사안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24일 고액 예치 손님으로 가장, 국민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 지점장을 권총으로 위협해 돈을 빼앗
아 달아난 정모(29)씨를 특수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이번 사건이 보다 충격을 주는 것은 정씨가 실제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범행 직후에도 정씨가 권총을 지니고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또 다른 범죄에 사용될지 모르는 위험천만의 상황이기도 했다. 경찰은 “서울 한가운데서 이런 강도사건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며 “범인이 권총을 소지하게 된 경위를 비롯해 범행동기, 공범여부 등 총력 수사를 벌인 결과, 결국 조기 검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자살하려다 맘 바꿔 강도짓
경찰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지난 18일 정씨가 범행에 사용할 권총을 훔치면서부터 시작됐다. 전과 8범인 정씨는 사실 오래 전부터 인터넷쇼핑 사기 등으로 수배 중인 상태였다. 한마디로 ‘도망자’의 신분이었던 것. 때문에 모친이 얼마 전 폐암으로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도망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고 한다. 정씨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판단, 서울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한 실내사격장에서 권총과 실탄을 훔쳤다. 경찰 조사결과, 정씨는 목동 사격장에 방문해 ‘홍보용 촬영을 하겠다’며 권총과 실탄을 사격대에 진열하게 한 뒤 사격장 업주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 업주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오스트리아제 9mm 권총 1정과 실탄 20발을 훔쳐 달아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막상 권총을 손에 넣자 자살하기보다는 차라리 은행을 털어 새로운 삶을 택하는 것이 효도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은행을 털기로 결심한 정씨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민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를 범행 장소로 정했다.

이틀만에 1,000만원 써
정씨의 범행은 주도면밀하고, 치밀했으며, 대담하기까지 했다. 20일 오후 4시께. 정씨는 깔끔하고 말쑥한 차림으로 이곳 PB센터를 방문했다. ‘자산관리 상담을 받고 싶다’며 다짜고짜 지점장을 찾은 것. 물론 속내는 ‘강도짓’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난 뒤여서 당시 은행 안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8억원을 예치하고 싶은데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라 찾아왔다”고 직원을 속인 뒤, 상담실로 안내받아 지점장 황모(48)씨와 접촉했다.
정씨는 30분 간 황씨에게 자산관리 상담을 듣는 척하면서 내부동향과 분위기를 살폈다. 별다른 보안 장치가 없는 것을 확인한 정씨는 이내 강도로 돌변, 권총을 들이댔다. 이 권총은 범행 이틀 전인 18일, ‘외국인 관광객에게 홍보해 주겠다’며 서울 목동에 위치한 한 사격연습장에서 실탄 20여 발과 함께 훔친 것이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놓은 실탄 1발을 꺼내 보이면서 “2주 동안 범행을 계획하면서 당신 가족과 집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 현금 2억원과 수표 1,000만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당황한 황씨는 현재 보유한 현금이 1억원 정도밖에 없다며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금고에서 현금 1억 500만원을 가져오게 했다. 정씨는 혹시 직원이 의심할 것을 우려, 황씨에게 평소 VIP고객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건물 밖으로 배웅할 것을 요구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또 범행현장을 뜨지 않고 PB센터 일대를 한바퀴 도는 등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경찰은 “정씨는 범행 전에는 송파구 방이동의 한 모텔에 장기간 투숙, 범행 당일엔 역삼동 한 고급오피스텔에 묵었으며, 이후에는 경기도 안양시 인덕원 근처의 한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며 “또, 은행에서 빼앗은 1억 500만원 중 1,500만원을 채무 변제로 사용하는가 하면, 안마시술소 이용, 각종 의류 및 시계를 사는 등 호화쇼핑을 즐기면서 단 이틀 만에 990여만원을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며 그의 무분별한 씀씀이에 혀를 내둘렀다.

대학졸업한 사기전과 6범
경찰에 따르면, 정씨의 사기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사기범’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사기행각을 벌이고 다녔다.
2001년 전북의 모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직후부터 시작된 사기 전과 6범에다가 올해 7월부터는 사기 등 8건의 사기·절도혐의로 경찰수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 정씨는 세 차례나 영국과 체코에 드나들며 어학연수를 하고 여행을 즐기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에서는 물건을 파는 척하며 돈만 입금 받아 달아나는 ‘천하의 사기꾼’으로 유명했다. 노트북, PC 등 컴퓨터 관련 제품을 싸게 판다는 광고를 내고 돈을 입금 받은 뒤 잠적하는 게 주된 수법. 또, 렌터카를 빌려 번호판만 바꿔 중고차라고 속인 뒤 되팔고 자동차 동호회에서 카오디오 등을 팔겠다며 돈을 받고 도주하기도 했다.
당시 정씨에게 사기를 당했던 한 피해자 A씨는 “정씨가 ‘그래픽 카드를 판다’며 글을 올려 30만원을 입금했는데 이후 물건이 오지 않아 피해자들이 단체로 정씨를 경찰에 고발했다”며 “당시 정씨는 자신을 영국유학생이라고 소개했으며, 사기 문제가 커지자 그의 아버지가 나서 돈 문제를 해결해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씨의 아버지는 전주 지역에서 잘나가는 공무원. 경찰은 “정씨의 아버지가 그동안 아들의 사기행각을 무마하기 위해 합의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썼다”며 “최근엔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왕래가 끊기자, 목돈을 마련하려 강도행각을 벌인 것 같다”고 전했다.
정씨의 사기행각은 영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런던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면서 하숙집을 차린 다음, 하숙생들의 보증금을 챙겨 달아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점장 아파트까지 알아내
그렇다면 정씨는 과연 혼자 범행을 저질렀을까. ‘공범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유동자산 10억원 이상이 있어야 가입할 수 있는 PB센터에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간 점, 은행 측이 범행 후 1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신고한 점 등으로 보아 금융계 쪽에 지인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난무하다. 또 18일 권총을 훔친 뒤 20일 은행을 터는 등 ‘일사천리’로 범행을 진행하면서 지점장이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누군가로부터 이런 사실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처음 보는 고객이 말로만 8억이 있다면서 다짜고짜 지점장과 상담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게다가 PB센터 고객상담실에선 통상 돈이 오가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 통장거래가 아님에도 직원들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PB센터는 상담이 주업무이기 때문에 현금을 거의 보관하지 않는데다 있더라도 전표 작성 등의 절차를 거쳐야만 출금이 가능하다. 또, 국민은행을 포함해 대개의 은행에서는 지점장이 전화로 부하 직원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시킬 수 없게 돼 있다. 지점장인 황씨는 “범인이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해 가족들의 안전을 확인했으며,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신고가 늦었다”고 에둘러 해명했다.
경찰은 “총기를 탈취할 때도 혼자 이동을 했고, 또 숙소생활을 장기간 했을 때 공범이 왔다갔다 출입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며 “게다가 검거 당시 훔친 돈의 대부분인 9,500여 만원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공범이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