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골프를 쳤다”
2006-10-31 김대현
3·1절 골프파문은 현정권에 적지 않은 ‘후유증’을 안겨줬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이해찬 전국무총리가 사퇴하면서 ‘레임덕’ 증세가 더욱 가시화됐다. 또, 열린우리당 입장에선 유력 차기주자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말았다. 골프파문 이후 일체 언론과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5선 중진, 이 전총리의 심중이 읽히는 대목이다. 3·1절 골프파문이 있은 지 6개월이 경과한 지금까지 당시 참석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요서울>은 재능대학 학장에 취임한 이기우 전교육부차관을 만나 어렵게 당시 사건에 대한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전차관은 “정말 운이 없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이 전차관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증인채택 여부를 놓고 여야간 충돌이 벌어졌을 정도로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야당과 언론의 파상적 공세에 대해 “더 이상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 전차관을 만나 3·1절 골프 파문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골프를 친 사람이다.”
지난 10월 9일 인천 동구 송림동 소재 재능대학 학장실에서 만난 이기우 전교육부차관은 학사업무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3·1절 골프파문의 앙금은 더 이상 그에게 남아 있을 ‘공간’이 없어 보였다.
3·1절 골프파문은 지난 3월 1일 이해찬 전국무총리와 이 전차관이 영남제분 류원기 회장 등 부산지역 기업인들과 ‘부적절한’ 골프를 쳤다는 의혹이 불거진 사건이다. 언론과 정치권의 숱한 의혹제기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혐의 없음’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상적 공세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남은 것은 이 전총리와 이 전차관의 사퇴 정도였다.
언론 보도 모두 스크랩해
이 전차관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관련 기사는 책으로 묶어도 몇 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서도 “이제는 (그 당시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체념하는 눈치였다. 그는 당시 온·오프라인 언론을 통해 보도된 관련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 놓고 있었다.
그는 “검찰에서 혐의가 없다는 결정이 나와 진실이 밝혀진 만큼,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려 한다. 정말, 운이 없었던 것 같다”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이 전총리의 사퇴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내치의 모든 것을 도맡아온 ‘책임 총리’가 일순간에 낙마하면서 정부내 혼선은 불가피했다.
또,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될 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온 여당 유력주자가 불명예를 떠안고 사퇴함에 따라 노 대통령의 레임덕 징후가 표면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던 이 전차관의 속내는 더욱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전차관이 이 전총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 지난 1998년 1월경이다. 당시 ‘국민의 정부’ 인수위원회 교육 분과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이 전차관은 이곳에서 이 전총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이 전차관은 “이 총리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분이라고 느꼈다”면서 “100대 교육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주 충돌했지만, 특유의 성실함이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이 전차관을 높이 평가했던 이 전총리는 교육부장관과 총리를 거치는 동안 줄곧 그를 주요 보직에 기용할 정도로 두터운 신뢰감을 표시했다. 일각에서 이 전총리의 최측근으로 이 전차관을 지목하는 이유다.
이 전차관은 3·1절 골프 회동에 대한 소식을 바로 전날 들었다고 한다. 이 전총리와의 일정이기에 예정된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영남제분 류원기 회장과도 1차례 인사를 나눈 사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 전차관은 “04년 9월 추석을 즈음한 시점에 류 회장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서로 연락을 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류 회장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지만, 나를 이용하거나 청탁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이 전차관은 마음 속 얘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특히, 일각에서 제기한 영남제분 주가조작 의혹과 삼미의 상품권업체 선정 의혹은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이 전차관은 “기관투자가인 교원공제회 입장에서 보면 100억원 정도의 투자는 실무자 선에서 이루어진다”면서 당시 공세를 취한 한나라당에 섭섭함을 드러냈다.
‘3·1절 골프회동 직후 삼미가 상품권 발행업체로 선정됐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나는 당시 교육부에 몸담고 있었기에 그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면서 정황을 설명했다. 3·1절 골프회동은 끝났지만, 이 전차관과 관련된 의혹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이 전차관은 골프 파문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지난 7월 재능대학 학장 제안을 수용한 대목에서 이미 이 전차관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전차관은 부산고 선배인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의 권유로 학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교육부 기획관리실장에 재직할 당시 이미 박성훈 회장의 제안을 나중으로 연기해둔 터였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5~6곳의 사립대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면서 재능대학과 인연을 맺은 배경을 설명했다.
부산고 선배가 학장직 제안
이 전차관은 재능대학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 국내 대학 사정이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혁신’을 통한 성공모델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그의 좌우명인 ‘3실’을 바탕으로 말이다.
이 전차관은 “내 좌우명은 진실, 성실, 절실을 묶은 이른바 ‘3실’이다”면서 “학내 모든 구성원들과 몸으로 부딪히면서 일류 대학의 토대를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교육계 고위관료라는 ‘타이틀’을 벗은 이 전차관이 교육 현장에서 또 다시 ‘고졸 신화’를 재연해 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이 전차관은 지난 9월 16일 경기도 모 골프장에서 3·1절 골프파문 이후 처음으로 이 전총리와 함께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