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천하된 한국정치판

2014, 여성정치인 대해부 ... 조윤선.나경원.박영선.심상정

2014-08-11     류제성 언론인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박영선 대표님은 헌정 사상 첫 여성 원내대표님으로 기록되셨는데 다시 한 번 축하 말씀 드립니다”(박근혜 대통령)
“첫 여성 대통령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지난 7월 10일 청와대 회동에서 박 대통령과 박 원내대표는 ‘여성 정치리더’란 공통분모를 화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 자리에는 역시 여성인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도 배석해 ‘여성 파워’를 실감케 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원내 사령탑인 박 원내대표는 지난 4일 새정치연합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7·30 재·보궐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한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로부터 제 1야당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원내대표

‘박영선 비대위원장’ 체제는 과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와 비교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2011년 연말 홍준표 대표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등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꾸려진 비대위를 지휘했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하면서 쇄신을 주도해 그 해 4월의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박근혜 선대위원장은 그해 8월에 치러진 당내 경선을 통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12월 19일 실시된 대선에서 당선됐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박영선 비대위원장’과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무게감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대선후보 카드였으나 현재 박영선 비대위원장을 대선주자로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아울러 오는 2016년 20대 총선까지 앞으로 20개월 동안 전국 규모의 큰 선거가 없는 만큼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역량을 발휘할 기회도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여의도 정가에선 ‘2014년 한국정치는 여인천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상이 뚜렷한 까닭이다. 물론, 여성 국회의원이 남성 국회의원 못지않게 배출되고 있는 북유럽 같은 경우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일단 양적으로도 여성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다. 이는 역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이 진출한 사례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나타난다.

1948년 구성된 제헌국회의 의원 정수는 200명이었다. 그러나 여성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대 국회에서 비로소 2명의 여성 의원이 지역구에서 탄생했다. 이후 7대 국회까지 1~3명의 여성 지역구 의원이 있었다. 하지만 8, 9, 10대에 다시 여성 의원이 지역구에서 한 명도 배출되지 못한 암흑기가 도래했다가 11대 국회에서 1명, 12대 국회에서 2명의 여성이 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다.

13, 14대 한명도 배출 못해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만 뽑는 소(小)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13대 총선과 1992년 14대 총선에서도 여성 의원은 지역구에서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다. 그러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전체 253명의 지역구 의원 중 여성이 2명 당선됨으로써 물꼬가 터졌다.

이후 지역구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한 여성 의원은 16대 227명 중 5명, 17대 243명 중 10명, 18대 245명 중 14명, 19대 246명 중 19명으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두 명 중 한 명은 여성을 공천하는 비례대표 의원은 별개다.

이 기간에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15대부터 19대까지 내리 5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것이 대표적이다. 새정치연합 한명숙 의원은 당 대표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박영선 위원장은 대표 직무대행을 겸임하면서 제1야당을 이끌고 있다.

특히 첫 여성 국가통치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한 이후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여성이 남성과 당당하게 경쟁하는 시대가 됐다.

현재 내각과 청와대의 경우 여성의 참여비율은 다소 미흡한 감이 있다. 박근혜 정부 2기 내각 18명(내정자 포함) 가운데 여성 각료는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이 유일하다. 청와대의 3실장-10수석비서관 체제에서도 여성은 조윤선 정무수석 한 명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김희정 장관은 재선 국회의원 관록으로 내각에서 정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윤선 수석은 청와대의 ‘넘버 3’로 꼽히기도 한다. 박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이 여름휴가 중일 때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청와대 핵심 참모는 “조 수석이 여성가족부 장관에서 청와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탁월한 업무능력과 정무감각으로 비서실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전국 순회 북 콘서트 마무리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을동 최고위원을 위시해서 류지영 중앙여성위원장, 민현주 대변인, 김현숙·박인숙·손인춘 원내부대변인이 정치권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야당의 경우 ‘추다르크’로 불리는 추미애 의원이 차기 대권을 겨냥해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추 의원은 최근 전국 순회 북 콘서트를 마무리했다. 내년 초로 예정된 새정치연합 대표 경선에 출마한 뒤 차기 대권에 도전할 채비를 차리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여성의 활약상이 눈에 띈다. 조은희 현 서초구청장이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에 최초의 여성 정무부지사가 됐다. 경북도에서는 이인선 정무부지사가 활동하고 있다. 6·4 지방선거를 통해 서울 강남3구의 구청장을 모두 여성이 휩쓸기도 했다. 신연희 강남구청장, 박춘희 송파구청장, 조은희 서초구청장이다.

2014년 한국정치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분석가들은 일단 세계적 추세에서 해답을 찾는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가 1982년 출판한 ‘메가트렌드’라는 책에서 21세기의 키워드로 제시한 ‘3F’가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3F’는 상상(fiction), 감성(feeling), 여성성(female)을 의미한다. 21세기에는 여성의 특징인 섬세함과 부드러움, 유연한 사고와 소통, 화합 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했고, 이 가치가 한국정치에도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더 구체적인 분석도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여태까지 한국정치에서 여성은 ‘과소대표(過少代表)된 측면이 있었지만 근래 들어 제 자리를 찾아가는 현상이 여성 정치인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법고시를 비롯한 각종 공무원 임용, 교직, 기업 등에서 여성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시대 트랜드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의미다.

감성 중요시하는 세대 풍조

아울러 ‘감성’을 중요시하는 세대 풍조가 여성정치인들의 수요를 촉발시킨 측면도 있다는 게 황태순 평론가의 보충설명이다. 비주얼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특히 여성 정치인들이 대중에 어필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강점이 있다는 해석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당들이 여성 대변인을 꼭 끼워 넣는 일도 이런 분석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여성 정치인의 득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지금은 남성 정치인들도 여성 정치인의 장점을 감안해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워낙 여성 인재풀이 적어 함량미달의 인물이 요직을 차지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비판이다.

오랫동안 정당 생활을 한 정치권 인사는 “솔직히 장관을 맡거나 금배지를 단 일부 여성 정치인들이 그만한 자질이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자신이 잘 아는 몇몇 여성 정치인들의 실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여성 정치인들은 또 정치판에서 미모로 승부를 건다는 등의 말이 나돌고 종종 루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국회의 나이 지긋한 중진 의원들이 어떤 여성 정치인을 총애한다는 등의 소문은 정가 루머의 단골 메뉴다. 국회 출입기자들조차 일부 여성 의원의 미모를 비교하는 말을 술자리에서 곧잘 한다. 한때 젊은 기자들이 모 여성 의원의 팬클럽을 결성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채 전 총장이 야당의 모 여성 의원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있다는 주장이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에 의해 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도 외모보다는 자질과 능력을 우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7·30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재입성해 3선 국회의원이 된 나경원 의원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나 의원에게 미모란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이제 그런 말보다 경륜을 갖고 평가해달라”고 정색하며 말하기도 했다.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