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정말 미치도록 범인 잡고 싶다”

2006-03-29     정은혜 
지난 86년 9월 15일부터 91년 4월 3일까지 6년여간 10명의 부녀자가 잔악한 수법으로 살해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대한민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오는 4월 2일이면 그 공소시효도 막을 내린다. 이 날이 지나면 범인을 눈앞에서 본다 하더라도 체포할 수도, 법정에 세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세계 100대 살인 사건’에 오르기도 한 이 희대의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된다.

사건해결을 위해 연인원 180만명 동원, 용의자 참고인 및 증인 1만 8,000여명 조사, 베테랑 형사 10만명 투입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범인의 이렇다 할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수사관들은 “아직까지 범인을 못 잡아 면목이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그들 모두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최근 쏟아지는 관심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화성 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대응을 꺼리고 있다.지난 2003년 화성사건 수사일지를 엮은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의 저자 하승균 전 경기지방경찰청 수사지도관 역시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하승균 전지도관은 “나에게 관심을 꺼 달라”며 “어떠한 질문도 일체 거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그는 당시 상황과 심경을 밝혔다. “당시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있었다.”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 등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긴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 말을 잇는 하승균 전지도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자신은 현직 담당수사관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작년 11월말 경찰을 떠난 그는 고별강연에서 “화성연쇄살인을 해결하지 못한 나는 실패한 형사고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이라며 후배경찰들의 분발을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구 미제사건 가능성 높아

그렇다면 수많은 베테랑 형사들의 옷을 줄줄이 벗게 한 이 범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10차 사건을 뺀 나머지 9건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밝힌 바 있는 하승균 전지도관은 범인의 범죄 특징을 이렇게 꼽고 있다. ‘범인은 부녀자를 상대로 강간한 뒤 목 졸라 살해하고 피살자의 속옷, 스타킹 등으로 결박하고 팬티와 거들로 재갈을 물렸다. 피살자의 음부는 강간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볼펜, 포크, 우산 등으로 난행을 일삼았다.’이어 그는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라며 “4,5,8,9,10차 사건에서 범인의 정액과 혈흔, 모발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는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목격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범인의 몽타주를 소개하기도 했다. ‘20대 중반 나이, 165~170cm 키, 찢어진 눈, 갸름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 등.’ 하지만 86년 범행 당시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범인은 40대 중반이 돼 있을 터다.

네티즌 인터넷 통해 ‘공개수배’

그래서 최근 그의 몽타주를 다시 그린 공개 수배 전단지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공소시효 만료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경찰관계자들의 진단이다. 범인이 다시 공개 수배되고 있는 ‘진짜’ 이유는 그 잔혹함과 빈틈없는 살인수법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들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연쇄 살인자는 반드시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면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일례로 지난 2004년 10월 27일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한 여대생 노모(당시 21세)씨 실종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화성 사건에 대한 공포를 다시 일깨우는 단초를 제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노씨는 실종 46일 만에 정남면 야산에서 부패된 사체로 발견됐다. 처음엔 노씨의 유류품이 너무 쉽게 발견돼 조만간 사건이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결정적인 단서나 제보는 커녕 의혹들만 커졌다. 화성지역 성인 남자 4,600여명의 DNA 검사를 의뢰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사건은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화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아직 살아있다면, 범인은 과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각에선 지난 91년 4월 이후 동일한 수법의 살인 행각을 멈춘 것으로 보아 범인이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 등으로 보아 범인은 아직 살아서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편 일각에서는 범인은 공무원이거나 기자 등 조사대상에서 제외되는 신분이거나 경찰일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하고 있다. 또 모든 수사 진행 상황을 현장에서 보며 사태파악이 가능한 주민, 혹은 성도착증을 가진 정신병자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얼굴 없는’ 범인이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가운데 이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막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정말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들의 ‘한’ 맺힌 절규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듯하다.


# ‘화성 연쇄살인사건’ 일지

▲ 1차 = 86년 9월 15일 오전 6시 20분.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 이모(71)씨. 하의가 벗겨지고 다리 X자형으로 복부에 밀착됨.
▲ 2차 = 86년 10월 20일 오후 8시.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 박모(25)씨. 나체상태로 수로에 유기되고 가슴에 흉기자국.
▲ 3차 = 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 권모(24)씨. 스타킹으로 양손결박하고 머리에 팬티를 씌움.
▲ 4차 = 86년 12월 14일 오후 11시.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둑. 이모(23)씨. 스타킹으로 결박하고 음부 난행.
▲ 5차 = 87년 1월 10일 오후 8시 50분.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 홍모(18)양. 스타킹으로 결박. ▲ 6차 = 87년 5월 2일 오후 11시, 태안읍 진안리 야산. 박모(30)씨. 솔가지로 은닉.
▲ 7차 = 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 안모(52)씨. 블라우스로 양손 결박해 음부 난행.
▲ 8차 = 88년 9월 16일 오전 2시.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 박모(13)양. 피의자 검거.
▲ 9차 = 90년 11월 15일 오후 6시 30분. 태안읍 병점5리 야산. 김모(13)양. 스타킹으로 결박해 음부 난행.
▲ 10차 = 91년 4월 3일 오후 9시. 동탄면 반송리 야산. 피해자권모(69)씨. 하의만 벗겨지고 음부 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