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금 미끼로 1억 2,700여만원 ‘꿀꺽’
‘재경부 대출 팀장’역할 돈되네∼
2006-03-14 정은혜
비밀업무라며 ‘입단속’
“현금 능력이 보증되면, 무기명 채권을 네 명의로 바꿔 대출해 주겠다.”이 사건의 피해자인 인테리어 회사 A사 대표이사 오모(37)씨. 전도유망한 벤처사업가 오씨는 지금도 이 말만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왜 당시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2000년 창립한 A사는 이듬해에 우수기업으로 지정될 만큼 잘나가는 회사였다. 그러나 이후 자금난을 겪게 됐고, 초기투자자들로부터 거둔 자금은 서서히 잠식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2005년 말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는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모든 경영책임을 져야할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사업자금을 구하기 위해 은행 및 사채시장 등을 돌아다니던 중 오씨는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소문 하나를 접하게 됐다.
‘사업자금 일부를 국가 돈으로 비밀리에 대출해준다’는 소문이었다. 오씨는 이번 건만 잘되면 그동안의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코스닥 등록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소문의 근원지인 회사 동료를 통해 김모씨를 소개받았다. 자신을 ‘재경부 6급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김씨는 재경부 차관보, 공 과장, 주 차장 등의 ‘가짜’ 직함을 가진 이들을 동원해 오씨를 현혹했다. 오씨는 세상 물정에 다소 어두워 사기극을 벌이기에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씨가 자신들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씨는 그에게 “수주자(대출을 신청해 놓은 사람)는 따로 있다”며 양모씨를 소개시켜 주기에 이른다.
고위공무원 ‘사칭’ 명함도 가짜
양씨는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비밀 대출팀장’이라며 “국가기금 일부를 비밀리에 대출해 주는 일을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양씨는 자신이 ‘잘나가는 고위공직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3명의 경호원을 동원했다. 이들은 무전기, 이어폰을 착용, 권총으로 무장하며 삼엄한 경호를 펼치는 등 실제와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오씨는 자신의 사업계획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양씨는 그 자리에서 1,200억원을 대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양씨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대출신청 보증 비용’과 ‘국채인수 비용’이 그것. 즉, ‘국가 돈을 받으려면 현금 동원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국채 중 무기명 채권을 유기명(오씨 명의)으로 전환하려면 비용이 든다’는 명분이었다. 오씨는 덜컥 의심이 들었다. 시종일관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원하는 만큼 대출해 줄 것처럼 말했던 이들이 갑자기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양씨는 오씨에게 “우리가 모시는 청와대 수보님(수석보좌관님)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밤늦은 시각 서울 근교의 한 야산에서 이들과의 극비 만남을 가진 오씨는 ‘수보님’ 앞에서 쩔쩔맸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근엄한 분위기에 위축됐기 때문. ‘수보님’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뭐가 필요해”와 “알았으니 걱정 말고 가 봐” 등의 말로 오씨가 속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내 오씨가 의심을 풀고 호감을 보이자, 이들은 ‘입단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밀리에 수행하는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절대 안 된다”며 오씨에게 겁을 준 것. 이렇게 해서 오씨가 내놓은 돈은 7차례에 걸쳐 무려 1억 850만원에 달했다. 양씨 일당은 오씨가 자신들을 끝까지 믿는 눈치를 보이자 또다시 작업에 들어갔다.이번에는 광고회사에 있는 이모씨가 대상이었다. 양씨 일당은 이씨에게 “대출신청 보증 비용과 국채인수 비용만 지불하면 100억원을 대출해주겠다”고 제의했다. 귀가 솔깃해진 이씨는 이들에게 1,900만원을 건넸다. 이로써 오씨와 이씨가 사기꾼들에게 건넨 돈은 1억 2,700여만원으로 늘어났다.
일당은 무직에 사기전과도
이 사기극이 드러나게 된 것은 거래가 이뤄진 지 석달 뒤인 지난 2월 중순께.문제의 대출금이 자꾸 차일피일 미뤄지자 눈앞이 캄캄해진 오씨가 결국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검찰조사결과 양씨는 ‘백수’에다가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친 적이 있는 ‘전과범’인 것으로 드러났다. 양씨가 데리고 다녔던 경호원들은 월급 80~90만원을 약속하고 동원한 20대 무직자였고, 그들이 차고 있던 권총은 장난감이었다. ‘수보님’은 일당 7만원에 동원된 엑스트라 전문 단역배우. 이 배우가 읊었던 두 마디 대사는 양씨가 써 준 대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씨 등은 검찰에서 “그들이 사기꾼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금으로 보증금을 내면 막대한 자금을 빌려준다기에 거래에 응한 것인데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벤처 기업인들이 양씨 일당의 어이없는 사기 행각에 걸려든 이번 사건에 대해 서울검찰청 특수부 수사1과 관계자는 “재경부 관계자는 비밀리에 어떤 일이든 다 가능하다고 믿는 모양”이라며 “자금난에 시달리다 보니 양씨의 제안에 솔깃했던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