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추억…‘천안이 떨고 있다’

2006-02-02     이수향 
‘살인… 또 살인…’ 인구 51만명에 불과한 천안이 살인의 공포에 떨고 있다. 새해가 시작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현재, 천안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무려 4건에 달한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몸조심합시다”가 안부인사로 자리잡았고, 아이들의 등하교와 신변보호를 맡아주는 경호업체의 서비스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현재 천안은 1주일이 멀다하고 발생하는 살인사건으로 인해 ‘살인의 도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다. 충남경찰청에 따르면 2004년부터 지금까지 천안지역에서 발생한 살인 및 실종사건은 총 18건에 이르는데, 그중 7건이 미제로 남아있어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고조되고 있는 상태다.

‘뭔가 심상치 않다’

살인의 공포가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지난 1월 20일, 천안시 풍세면 가송2리에서 소정간 도로공사 현장 인근 논에서 송모(26·여)씨의 사체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올해들어 천안지역에서 발생한 4번째 살인사건이었다. 경찰 수사결과 송씨의 행적은 지난 12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 생활정보지에 실려있는 한 업체의 구인광고를 보고 나간지 8일만에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

송씨의 코와 입에는 누런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으며, 양 손 역시 같은 테이프로 결박된 상태로, 시신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게끔 부직포로 덮여 있었다. 경찰이 이 사건을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이유는 송씨의 사체가 발견되기 약 일주일 전에 현장 주변에서 이미 또 한 구의 끔찍한 사체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오전, 천안시 풍세면의 한 공사현장 굴다리 밑에서는 표모(26·여)씨의 시신이 흉기에 찔린 뒤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됐다. 표씨와 송씨의 사체가 발견된 장소는 거리상으로 볼때 불과 50여m 떨어져 있어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인접한 장소에서 근 일주일새에 연달아 두명의 여성이 살해되자 경찰은 사건의 연관성에 주목, 즉시 수사에 들어갔다.

특이한 것은 연달아 살해된 두 여성 모두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 후 변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살해된 두 여성이 면접을 보기 위해 나간 업체가 천안시내에 있는 H상사라는 곳으로, 동일한 업체였다는 사실이다. 표씨와 송씨는 생활정보지에 ‘컴퓨터를 다루는 20대 여직원 구함’이라는 구인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 것으로 확인됐는데, 광고에 실린 핸드폰 번호는 대포폰인 것으로 드러나 어떤 목적하에 계획된 범행임을 짐작케 했다. 특히 두 여성 모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외에도 통장사본 등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간 것으로 알려져, 범인들이 취업을 미끼로 피해자들의 명의로 대출을 받으려다 실패하자 살해한 것이 아니겠냐는 전제하에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성난 민심, 속타는 경찰

하지만 연달아 터지는 강력사건들은 흉흉한 민심으로 직결되고 있다. 특히 토막살인과 소각 등 잔혹한 살해수법에 사람들은 “불안해서 못살겠다”, “20일만에 살인사건이 4건이나 일어나는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 별 진전없이 제자리 수사에 머물고 있는 경찰수사 및 평소 허술한 치안 시스템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우연’일 뿐이라고 믿고 싶은 눈치다. 경찰 역시 천안이 자칫 살인의 도시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최근 강력사건이 빈번하게 터지긴했지만, 천안을 ‘제2의 화성’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오버예요. 살인사건은 어느 곳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에요” 라는게 천안경찰서 관계자의 말이다.

반면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충남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화성살인도 처음에는 모두들 우연히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악몽의 시작이었습니다. 잊혀질만하면 터지고… 그렇게 수년간 죽어나간 사람만 10여명이에요. 초기에 해결못하면 미궁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라며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특히 그는 아직까지 뚜렷한 단서를 잡지 못해 미제로 남아있는 강력사건만 수건에 달한다며 답답함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과의 이동시간이 1시간 내로 줄어들고 외부 유동인구가 많은 천안의 특성상, 사건해결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도 있죠.”

치고 빠지기식 범죄 횡행

사실 천안이 살벌한 도시라는 오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번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2004년 이후 천안에서 발생한 납치 및 살인사건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 사망자만 17명에 달한다. 천안의 흉악범죄는 2004년 10월 천안시 쌍룡동에 사는 한 여고생이 홀연히 실종되는 사건이 신호탄이었다. 더욱이 같은해 11월 같은 학교 여고생이 두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되자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증폭됐다. 또 지난 1일 아산시 배방면에서는 지난해 11월 실종된 모 대학 경리부장의 사체가, 10일 성환읍의 한 쓰레기 분리수거함에서는 50대 여성의 토막난 사체가 발견, 시민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2005년 천안지역에서 발생한 강력사건만도 무려 5,000건. 특히 10월 이후 며칠 간격으로 강력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결국 지난 14일에는 업무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천안경찰서 수사과장이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루머만 무성, 범인은 웃고있다?

현재 경찰은 20대 여성 연쇄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통합수사전담팀(34명)을 구성하는 동시에, 성환읍 토막살인 사건에도 천안경찰서 전담팀(12명)을 투입, 범인 검거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히 20대 여성 연쇄 살인사건의 경우, 업체광고에 쓰인 대포폰이 9일 택배회사를 통해 한 단신의 30대 남성에게 전달된 사실이 드러나 범인의 윤곽이 좁혀지는 등 수사에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은 아직까지 단서도 잡지 못한 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아 경찰과 시민들의 애를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피해자의 연령대와 성별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 KTX, 수도권 전철의 개통으로 외지인의 ‘치고 빠지기’ 범죄도 간과할 수 없다는 점 등은 경찰 수사의 난항을 예상케하는 부분이다.

경찰내부에서는 범인에 대해 ‘외지인’, ‘신원확인이 어려운 외국인 노동자’, ‘여고생에 집착하는 변태성욕자’, ‘돈을 노린 범죄’, ‘치정살인’등의 루머들이 난무하지만, 최근 발생한 20대 여성 살인사건을 제외하면 사건들간에 특별한 공통점이 없어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범인이 이미 천안을 유유히 빠져나갔을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경찰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다각도로 수사를 진행중이다.일단 이번 사건은 구직을 미끼로 20대 여성을 꾀어내 대출금을 타먹기 위한 단순범행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이다.그렇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실종후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한 여고생과 토막난 시신 등 미제사건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얼굴없는 범인은 지금도 경찰수사를 비웃으며 또다른 살인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