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서장인데… 돈 좀 빌려줄 수 있나?”
2005-10-11 이수향
대박의 꿈에 ‘올인’
지난 2003년 1월. 모 지방경찰서장으로 재직중이던 김씨는 이 지역의 한 인사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강원도 정선 카지노에 출입하게 된다. 평소 도박과는 거리가 멀었던 김씨였지만 순식간에 돈을 잃고 따기도 하는 도박판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몇 번 하던 것이 점차 그의 습관으로 변해버린 것도 이 시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처럼 그는 도박에 급속히 빠져들기 시작한다. 돈을 잃는 날은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으며, ‘한번만’ 더하면 돈을 딸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도저히 발을 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도박장에 거의 출퇴근하다시피하며 지내는 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주말이나 휴일, 휴가 때는 물론 사흘에 한번꼴로 도박장에서 살다시피하는 수렁의 길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평소 업무에 철저한 그였지만 도박에 맛을 들인 후 그의 생활도 흐트러지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지각이라고는 모르던 김씨가 이 무렵부터 월요일에 종종 지각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그러나 김씨가 도박에 빠졌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장의 신분으로 카지노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평소에는 경찰서장으로, 주말과 밤에는 카지노 중독자로서의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 김씨의 카지노 출입은 2003년 4월 모 지방경찰청 간부로 발령을 받은 이후에도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도박에 빠진 그는 점점 많은 돈을 도박에 부어넣기 시작했다. 김씨가 즐겨한 도박은 ‘바카라’. 어쩌다 ‘운이 좋아’ 돈을 따는 기쁨도 잠시, 도박은 역시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대박의 꿈’에 젖어있던 김씨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가지고 있던 현금 7천만원과 대출 받은 돈 3억 3천만원을 모조리 도박에 쏟아 붓게 된다. 하룻밤에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을 잃기도 하면서 그는 결국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4억원을 잃게 된다.
승진미끼로 부하직원 돈 갈취
그러나 욕심은 욕심을 낳는 법. 자금이 바닥난 그는 측근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마땅히 돈을 빌릴 곳이 없게 되자 그는 결국 ‘경찰서장’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 부하직원들에게 손을 벌리기에 이르렀다. “나 서장인데 돈 좀 빌려 줄 수 있나”라는 김씨의 말에 승진을 앞둔 직원들은 거절할 수 없었으며 10여명은 앞으로 승진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돈을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방법으로 김씨가 2003년 7월부터 직원 24명과 지인 등 총 40여명에게 빌린 돈은 무려 15억7,700여만원. 그러나 카지노에서 하룻밤에 수백~수백만원씩을 잃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2003년 말경 친인척과 부하직원들로부터 빌린 돈까지 모두 탕진한 후 막막해진 그는 사실상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결국 작년 2월 27일 사표를 내고 돌연 잠적했다. 조사결과 김씨가 카지노에서 날린 돈은 무려 54억여원. 그는 도박에 빠져 살던 416일 중 150일 이상을 강원랜드에서 보낸 것으로 드러났는데, 경찰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동명이인의 운전면허증을 복사해 VIP 출입증을 발급받아 카지노에 드나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돈을 다 잃은 상황에서 사표를 제출하기 사흘전까지도 카지노에 출입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도박에 깊이 중독된 상태였는지를 말해준다. 안동의 사글세방과 서울 변두리의 반지하방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해오던 김씨는 경찰서장이었다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초췌한 모습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사건 후폭풍 일파만파 “여럿 죽네”
이번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충북경찰청은 한정갑(50) 경찰종합학교장이 2003년 특정인을 승진시키기 위해 추천서열을 앞당기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김씨의 진술에 따라 비리사실을 밝혀내고, 7일 한 치안감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지난 2003년 승진을 대가로 김씨에게 4,500만원을 건넨 혐의로 5일 제천경찰서 최모(57)경정을 구속한데 이어 돈을 건넨 경찰관 중 승진한 4명에 대해서도 뇌물혐의 여부를 수사중이다. 한편, 전담수사반까지 구성하고서도 1년 반이 넘도록 김씨의 행적을 찾지 못했던 경찰역시 검찰이 이 사건을 단 두달만에 해결함에 따라 ‘제 식구 감싸기’라는 구설에 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