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성욕 앞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2005-09-20     이수향 
‘강남판 발바리를 아시나요.’강남 일대 부녀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강남판 발바리가 드디어 잡혔다. 강남일대에서 발생한 연쇄 택시 강도·강간 사건의 용의자인 그는 한달반 동안 경찰과 숨바꼭질을 한 끝에 검거됐다. 경찰은 지난 12일 이 사건의 용의자 한모(32)씨를 강도·강간 혐의로 구속했다. 조사 결과 한씨는 훔친 택시를 몰고 다니면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약 한달반 사이에 20여차례에 걸쳐 강도·강간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말. 강남일대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 택시를 몰고 다니면서 여성 승객을 태운 뒤 상습적으로 강간을 일삼고 금품을 빼앗는다는 소문이었다. 연달아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에 일부 아파트에서는 ‘택시승차 요주의’ 방송 및 전단이 나붙기도 했다. 특히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남성은 어김없이 범행을 저지르곤 하는데, 워낙 강남지역을 신출귀몰하게 휘젓고 다녀 ‘강남판 발바리’로 불리던 차였다.

일부 아파트 ‘택시승차 요주의’까지

한달여간의 경찰의 집중 수사 끝에 검거된 용의자 한씨. 비오는 날에 집중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이유로 정신 이상자나 성도착증을 지닌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추측과 달리 그는 너무도 평범한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 한씨가 범행을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26일경. 몇 달 전 부인과 이혼한 후 특별한 직업없이 생활해오던 한씨는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5살난 아이까지 둔 가장이었지만, 그의 생활은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혼 후 그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갔다. 제대로 된 생활능력이 없던 한씨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급했다. 그리고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욕정도 감당하기 어려운 유혹으로 다가왔다.

돈도 욕정도 감당키 어려운 유혹

결국 그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택시기사를 가장한 강도·강간. 운전외에는 마땅히 배운 기술이 없던 그에게 택시운전은 가장 손쉽게 범행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씨는 범행에 사용할 택시를 훔친 뒤 다른 개인택시로부터 훔친 번호판을 붙였다. 또 외부에서 차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차 유리창에 짙은 선팅을 했다. 차안에는 여성들을 결박할 수 있는 끈과 테이프를 비롯, 여성이 반항할 경우 위협할 수 있는 흉기까지 미리 준비해뒀다. 한씨는 자신의 범행 무대를 강남일대로 정했다. 아무래도 강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현금도 많이 가지고 다닐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강남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외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착안, 미리 범행 장소 및 감시가 소홀한 현금인출기가 있는 장소를 물색해두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감시 소홀한 현금인출기 물색도…

지난 달 10일 오후 8시경, 하루종일 비가 내리던 궂은 날씨였다. 강남구 개포동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던 그에게 승객 권모(37)씨가 걸려들었다. 권씨가 타자마자 한씨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일원동 근처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와 다른 길로 들어서자 권씨는 즉시 항의했고, 이내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택시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차문과 유리창은 운전석에서만 열 수 있도록 단단히 잠겨진 상태였다. 한씨는 미리 눈여겨봐 두었던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웠다. 초저녁이었지만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는 반항하는 권씨를 준비해둔 흉기로 위협, 강제로 성폭행했다. 그러나 그의 범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권씨의 양손과 발을 묶고 눈을 가린 후 지갑에서 현금 50여만원을 뺏는 한편, 신고할 것에 대비 휴대폰 카메라로 나신을 찍어 두기도 했다. “만약 신고할 경우 인터넷에 나체사진을 뿌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폰카로 협박용 나체사진도 찍어

이에 앞서 지난달 3일에는 23살 여대생이, 또 지난 9일 오후 9시경에는 양재동에서 승차한 40대 주부가 한씨의 범행대상이 되는 등, 그의 범행은 나이를 불문하고 비오는날 초저녁이면 어김없이 이뤄졌다. 약 한달반 동안 계속된 한씨의 범행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짙은 선팅을 한 채 훔친 번호판을 바꿔가며 그가 몰던 택시는 강도·강간을 일삼기에 더없이 좋은 ‘작업장’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택시였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피해 여성만 20여명, 피해액수만도 총 3,000만원에 달했다. 강남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한씨의 행각은 그가 자주 이용하던 현금 인출기앞에서 잠복중이던 경찰에 의해 결국 한 달여만에 막을 내렸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인 피해와 충격을 남기게 됐다.

# “재수없으면 걸리는거죠”

이번 사건을 담당한 서초서 한정수 형사. 그는 “여성 승객을 상대로 한 강도강간사건은 날로 늘어가고 있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어 답답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형사는 “초저녁 강남 한복판에서 버젓이 사건이 발생하는 판에, ‘밤늦은 시간 택시를 타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범인이 범행을 계획한 이상 ‘재수없으면’ 누구든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이번 사건을 분석해본 결과 범행은 여성승객이 많이 타는 8시~10시에 집중되어 있었다”며 “보통 택시 강간 사건이 심야나 새벽시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과 비교해볼때 초저녁을 범행시간으로 잡은 이 사건은 무척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한 형사는 또 “한씨는 비오는날에 여성들의 택시이용이 증가한다는 점, 경찰의 단속이 소홀하다는 점에 착안해 파렴치한 범행을 이어나갔다”고 전했다. 한 형사는 “택시를 이용한 범행에는 도난택시가 이용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도난 차량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차량의 이상 유무를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택시에 의무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