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영웅’을 원한다
2005-06-14 이석,이수향
지난 4일 밤. 2006년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인 우즈베키스탄전을 지켜보던 우리 국민들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0-1로 뒤지던 후반전 종료 직전 박주영이 통쾌한 동점골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 한 골로 인해 한국은 천길 낭떠러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파장은 거셌다. 언론들은 “박주영이 한국 축구를 구했다”면서 그의 활약을 대서특필했다. 한국 축구가 마치 박주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FIFA도 홈페이지를 통해 박주영을 ‘아시아의 바지오’로 평가하면서 2005년 네덜란드 청소년 축구대회를 빛낼 예비스타로 소개했다. 이런 박주영 ‘신드롬’은 스포츠 영역뿐만이 아니다.
LG전자, GS그룹, 동아오츠카, 롯데제과 등 박주영을 CF모델로 확보한 기업은 톡톡히 마케팅 효과를 누리고 있다. LG전자는 자사의 위성DMB폰 광고에 박주영을 출연시켜 일일 판매량이 현재 1,000대를 넘어섰다. 벌써부터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롯데제과의 ‘월드콘’과 동아오츠카의 기능성 스포츠 음료 ‘아미노 밸류’도 박주영 신드롬으로 인해 연일 기록을 갱신 중이다. 특히 롯데제과는 여름철이라는 계절적 특수까지 더해 박주영의 활약상이 빙과류 판매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주영의 소속팀인 서울FC를 산하에 두고 있는 GS그룹은 더하다. 3~4편의 계열사 광고와는 별도로 박주영이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탓에 짭짤한 입장료 수익까지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룹 관계자는 “박주영 신드롬에 힘입어 그룹은 CI 교체 홍보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이는 컵대회를 찾은 관중수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삼성하우젠컵2005’에서 박주영이 출전한 11경기에 몰려든 관중 수는 무려 31만 737명. 경기당 평균 2만8,248명이 박주영을 보기 위해 몰려든 셈이다. 특히 서울 대회의 경우 경기당 3만2,415명이 박주영을 보기 위해 상암 경기장을 찾았다. 경기당 3만명 돌파는 K리그 최고 인기 구단인 수원도 단 한번도 이뤄내지 못한 기록이다. 박주영의 힘은 정치권도 뒤흔들고 있다. 9일 정책의총을 연 열린우리당은 최근의 지지도 하락을 염두에 둔 듯 “여당 의원들 각자가 박주영과 같은 의원이 된다면 국민들의 멀어진 신뢰도 손쉽게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문했다.
일부의 경우 박주영의 골 세리머니를 지적하기도 한다. 골을 터트릴 때마다 이어지는 박주영의 기도 세리머니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박주영이 골 세리머니로 특정 종교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대중들의 거부감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주영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지지를 넘어서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실제 다음과 같은 포털사이트에는 현재 ‘박주영’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카페만 300여개에 달한다. 카페수도 1주일 간격으로 적게는 십여개, 많게는 수십개씩 개설되고 있다. 심리 전문가들은 일련의 추세를 ‘영웅 심리’에서 찾고 있다.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원장은 “최근 불고 있는 박주영 신드롬은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싶은 민초들의 바램 아 반영된 것”이라면서 “장기불황, 정치권 다툼 등에 대한 해방구로 스무살 청년에게 열광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같은 ‘묻지마 사랑’이 곱지만은 않다. 주변 선수들, 특히 자라나는 선수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조 본프레레 대표팀 감독이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대표팀에 발탁된 박주영(20·FC 서울)에게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를 우려하고 있다. 본프레레 감독은 박주영이 출전하는 FC 서울의 경기를 관전할 때마다 “어린 선수에게 기적을 바라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박주영이 볼만 잡아도 관중들이 환호한다. 이런 지나친 관심은 선수에게 해가 된다”며 ‘박주영 신드롬’에 일침을 날린 바 있다. 잠자기가 취미인 스무살 청년에게 있어 이같은 관심이 부담스러운 눈치다. 박주영은 “부담이 되지 않도록 응원해 주셔서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 더 좋은 플레이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주영에 대한 짝사랑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이 이같은 ‘이상 열광’에 우려를 표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신드롬 열기에 동참하면서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자신과 무관한 문제에 빠져있는 동안 청년실업과 같은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화평론가 강영희씨도 “과거 신드롬이 급변하는 사회 문화 환경에서 대중의 사회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좌표’ 역할을 했다면, 최근에는 완전히 마케팅의 수단으로 속류화됐다”면서 “하나하나의 신드롬을 분석하면서 원인을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 전국 강타한 각계 ‘신드롬’ 천문학적 경제효과… 청량제 역할
경제계 SK텔레콤 윤송이 상무
한국과학기술원과 미국 MIT를 조기졸업해 세계를 놀라게 한 SK텔레콤의 윤송이 상무(29)는 여성 인력의 진출이 쉽지 않은 경제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윤상무는 작년 11월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주목해야할 세계 여성 기업인’ 리스트에서 경영진 부문 24위를 차지하며 이름을 올렸다. 윤상무의 성공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진출이 쉽지 않은 비즈니스 영역에서 과히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학 계 황우석 교수
청와대가 황교수의 연구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한국은 현재 ‘황우석 일병구하기’ 작전에 ‘올인’하고 있는 분위기다. 국민들 역시 “국보급 교수”, “차기 노벨상감” 등의 찬란한 수사를 곁들여 그를 칭송하며 황우석 신드롬의 도가니에 빠져있다.
예술계 발레리나 강수진
무대에서의 뛰어난 테크닉과 화려한 체취, 타고난 미모와 신체조건 등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강수진(39)은 240년 역사의 세계적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마흔을 바라보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지독한 연습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발 사진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강수진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스포츠계 골프선수 박세리
LPGA를 휩쓸고 있는 한국 여자골프의 중심에는 단연 박세리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 무대에서의 박세리의 눈부신 활약은 골프가 일부 부유층의 취미생활이라는 인식을 단번에 뒤엎고 국민들을 ‘골프광’으로 만들어버렸다. 골프 하나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박세리의 극기훈련담과 뚝심은 온 국민을 매료시켰다. 또 ‘제 2의 박세리’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달에 천만원이 넘는 고액 골프레슨이 유행하기도 했다.
연예계 배우 배용준
일본에서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배용준. 너도나도 한류스타를 표방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신드롬’을 붙일만한 스타는 사실 드물다. 팬들은 배용준의 미소 한번, 말 한마디에 열광하고 있으며 그의 패션과 머리 스타일, 소품 등은 최고의 유행으로 자리잡았다. 또 얼마전 일본 SONY 광고 출연료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배용준이 벌어들이는 외화 수입은 실로 막대해 오히려 하나의 중견 기업에 가깝다.
외국인 거스 히딩크 감독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로 인해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단숨에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른바 ‘히딩크 신드롬‘은 그라운드를 넘어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열병처럼 번졌다.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을 단숨에 4강까지 끌어올린 ‘동력’이 뭔지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주요 기업과 연구소에는 그의 탁월한 지휘 능력을 모범 경영사례로 인정하고, ‘멀리 내다보고 소신있게 이끄는 리더십’을 배우려는 열풍이 유행처럼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