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극 실패는 ‘연기 미숙’?

2005-03-24     김재윤 
한 때 유망주로 촉망받던 아역탤런트 출신의 한 남성이 사기행각을 벌이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해주겠다” 며 외국 투자회사의 한국 지사장 행세를 하며 투자자들로부터 수억원의 금품을 가로챘던 것. 경찰은 유사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 중에 있다.80년대 초 아역탤런트로 명성을 날리던 천 모(36)씨. 그러나 주목받던 어린시절과는 달리 성인 연기자가 되고 나서는 가끔 조연으로 출연했을 뿐 이렇다 할 출연작이나 활동은 거의 없었다. 마땅한 수입이 없자 천씨는 연기생활과 리조트의 통역 업무를 병행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천씨의 생계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살 방도를 걱정하던 천씨는 결국 범행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고심 끝에 천씨는 리조트 통역원시절 알게 된 태국의 모 투자회사 사장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이용, 사장과 친분 관계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이를 전면에 내세워 본격적인 사기 행각에 돌입하게 됐다.천씨는 탤런트 활동을 하면서 잘 알려진 안면을 이용, 태국 투자회사의 한국지사장인 것 처럼 신분을 속이고 개인 사업자들에게 접근했다. 천씨는 작년 3월 사업을 구상 중인 A씨에게 접근해 “태국 본사의 사장과 각별한 사이다. 태국의 본사로부터 9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해주겠다” 며 “투자금 유치 신청비용과 업무 진행 비용이 드니 착수금 조로 돈을 먼저 달라”고해 A씨로부터 7,000만원을 챙겼다. 얼굴이 알려진 덕에 사업을 준비 중인 사람들은 천씨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했다. 더구나 천씨가 태국 본사 사장과 이메일을 수시로 주고받는다며 통역사 시절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여줘 피해자들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기’가 성공을 거두자 천씨는 본업인 연기활동은 완전히 접고 ‘태국 투자회사 한국 지사장’ 연기에만 충실하게 됐다. 천씨는 사업 준비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신분을 속이는 것은 물론 “강원도 정동진에 초대형 리조트를 짓기로 강원도측과 합의했다. 투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투자금을 끌어주겠다” 는 등 거짓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위와 같은 수법으로 천씨는 총 3억여원의 돈을 갈취할 수 있었다.그러나 천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천씨가 투자해 주겠다는 태국의 회사로부터 지원 소식이 없자 피해자들이 “지원해 준 투자 유치금과 업무 착수금을 돌려달라” 는 요구를 한 것이었다. 카드빚 등으로 이미 돈을 탕진해 돈을 돌려줄 길이 없게되자, 천씨는 또다른 사기극을 준비하게 됐다.

사기극을 덮기 위해 또다른 사기극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었다.천씨는 알고 지내던 화장품 판매회사 사장 B(48·여)씨에게 “태국 투자회사 한국 지사장인데 화장품 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접근했고, 때마침 제주도에 호텔을 짓고 화산재로 만든 화장품을 개발해 회사를 세우려던 B씨는 천씨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이어 천씨는 B씨에게 “태국 본사에서도 화산재 화장품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2,300만달러(한화 약 240억원)를 유치하도록 도와주겠다” 며 B씨를 유혹했다. B씨는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천씨의 계좌로 투자금 유치신청비와 토지 감정비 등의 명목으로 1억 8,000만원을 10차례에 걸쳐 입금했으나 결국 떼이고 말았다.

결국 B씨의 신고로 천씨의 사기행각은 멈추게 되었다. 경찰 조사에서 천씨는 “카드빚은 늘어가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어 사기행각을 저지르게 됐다” 며 “탤런트 활동을 해서인지 사람들이 쉽게 의심하지 않았다. 한, 두 번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이미 저질러 놓은 사기극을 수습해야 하므로 멈출 수 없었다” 고 밝혔다.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에서는 천씨가 추가 범죄를 저질렀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 중에 있다. 외사과 관계자는 “천씨가 사기극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사기극을 저지른 것으로 미뤄볼 때 피해자들이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 며 “최근 경기침체와 불황을 틈타 해외자금 유치 등을 미끼로 투자금을 끌어들여 가로채는 사례가 늘고 있는 만큼 천씨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할 방침” 이라고 설명했다. 한 때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천씨. 그러나 계속된 사기행각으로 탤런트의 꿈도, 미래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