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2005-03-04 이수향
이미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벽이 쌓일 만큼 쌓인 이들은 결국 2년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5년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혼 후 양씨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양씨는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집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친정과 주변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생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양씨의 친정은 그를 도와줄 만큼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아파트 관리비를 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던 양씨의 친정도 살림이 빠듯했던 것. 특히 그런 처지의 그에게 사회는 냉정했다. 어린 딸(6)을 거느린 이혼녀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직장도 없고 일정한 수입원도 없는 그가 딸을 키우며 살아가기란 실로 엄청난 부담이었으며 당장 생계를 꾸려가기조차 벅찰 정도로 상황은 악화됐다.
마땅한 수입이 없던 양씨는 광주에 위치한 한 작은 회사에 경리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나 100만원을 훨씬 밑도는 월급으로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 월세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수개월 동안 아파트 관리비를 한 푼도 내지 못해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등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통지서와 독촉장이 들어오자 그는 더 조급해졌다. 더구나 어린 딸의 유치원 수업료를 내지 못해 수차례 통보를 받자 양씨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그때그때 급한 돈을 해결하긴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가족과 친지들도 모두 등을 돌려 더 이상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그는 지난해 2월경 급기야 사채에 손을 뻗기에 이른다.
사채의 무시무시한 이자율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양씨에게는 없었다. 그가 체납된 아파트 관리비와 딸의 유치원 수업료, 자신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빌린 돈은 대략 150만원. 이렇게 해서 그는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채에 손을 댄 것이 몰고올 엄청난 비극에 대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돈을 갚기로 한 날이 다가왔지만 양씨가 사채업자에게 빌린 원금을 갚을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9월까지도 그는 빌린 돈을 갚지 못했다. 그 결과 이자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불어났으며 원금을 제외하고도 연 600%에 달하는 살인적인 이자를 그가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그가 물어야 할 이자만 해도 월 80만원 정도에 이르렀다.
당연히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의 독촉이 시작됐다. 그들은 양씨에게 하루 수십통의 전화를 거는 것은 기본, 전화를 피하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는 등 본격적으로 강한 독(덧말:毒)촉을 해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빚독촉을 해대는 바람에 양씨는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야 하는 악몽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뛰는 등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심신은 지쳐갔다. 그러나 사채업자들의 협박은 날로 심해졌다. 양씨가 약 7개월 동안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은 험한 말로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그들은 양씨에게 “유흥업소에 취직을 해서 빌린 돈을 갚으라. 시일내에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갖은 협박을 가했다. 사채업자들의 협박을 견디지 못한 그는 급기야 위험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공금을 빼내 빚을 갚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관리부에 근무한 탓에 회사돈을 만질 기회가 많았던 양씨는 결국 회사통장에서 한번에 수십만원씩 몰래 빼내는 수법으로 돈을 챙겼다. 약 15차례에 걸쳐 그가 빼돌린 회사 공금은 지난해 8월부터 11월 중순까지 무려 1,200만원에 달했다. 광주 북부경찰서는 24일 양씨에게 절도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사건을 담당한 지능수사팀의 박근호 형사는 “5년전 이혼한 양씨는 어린 딸을 키우며 친정에 얹혀 살았다”며 “양씨가 이중 삼중의 생활고로 무척이나 힘들게 생활했던 것으로 알고있다”고 귀띔했다. 박 형사는 “양씨가 비록 죄를 짓긴 했지만 줄곧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