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안일한 가정폭력 대응이 살인 불렀다

2005-01-13     이수향 
지난 6일 서울 동부지법에 한통의 소장이 접수됐다. 이 소장은 작년 9월 사실혼 관계에 있던 동거남 최모(60)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살해된 황모(당시 41세)씨의 유가족들이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황씨의 유가족은 “경찰이 가정폭력에 대해 안일한 대응을 한 탓에 황씨가 살해당했다”며 경찰의 직무유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측은 유가족측의 입장에 강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유가족측 “경찰의 직무유기”

유가족측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황씨는 생전에 동거남 최씨의 가정폭력에 수차례 시달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황씨는 경찰에 세차례나 신고를 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매번 ‘부부문제는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황씨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이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경찰이 가정내 문제라며 일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가족측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씨와 국가를 상대로 3억7,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경찰측 “어불성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송파경찰서측은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송파서 윤덕모 경무과장은 황씨 유가족들의 행동에 대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며 “경찰이 가정폭력문제에 대해 수수방관했다는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 윤 과장은 지난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정확한 사건일자까지 거론하며 경찰이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을 했다고 설명했다.윤 과장은 “경찰은 신고가 들어왔을 때마다 즉시 출동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임무를 다했다”며 “직무유기니 미온대응이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라 강조했다.첫 번째 신고를 받은 날짜는 지난해 5월 8일 7시 25분 경이다.황씨는 최씨에게 폭행을 당해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윤 과장에 따르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황씨에게 “가정 및 직장 100m내에 최씨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씨는 이를 거절했다는 것.당시 황씨는 최씨가 휘두른 맥주병에 의해 상처를 입었는데 출혈이 심해 경찰병원에서 현대병원으로 재후송을 하는 등 경찰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윤 과장은 “당시 가해자 최씨를 상해죄로 불구속기소했으나 오히려 황씨는 최씨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7월 14일 동부지검에 합의서까지 제출했다”고 말했다.두 번째 신고 날짜는 지난해 8월 31일이다. 윤 과장은 “실제로는 황씨의 언니가 최씨를 폭행했다”며 “황씨 언니로부터 폭행을 당한 최씨가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았기에 사건을 종결지었다”고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지난해 9월 15일 송파서에 황씨의 세 번째 신고가 들어왔다. 가락지구대 김모 경사와 박모 경장이 사건 접수 후 즉시 출동했으나 피해자라던 황씨가 “폭행당한 사실이 없고 처벌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경찰측은 주장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황씨의 태도로 보아 폭력이 재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상반돼 재판부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가 관심이다.

공권력 개입기준 어디부터인가?

이번 사건으로 가정 폭력에 경찰이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불거져나오고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부부 싸움은 마땅히 부부끼리 해결할 문제로 인식돼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계는 아무리 제 3자라 할지라도 가정폭력을 집안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부부싸움으로 보고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가정폭력에 대한 경찰개입에 대한 논란은 이미 2003년에도 있었다.

2003년 8월 11일 안상수 의원(한나라당)이 대표 발의한 ‘가정폭력범죄의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중 개정법률안’은 “가정보호사건의 관할검찰청 검사장은 사법경찰관리가 가정폭력범죄 신고를 받고도 이유없이 응급조치를 않거나 게을리한 때에는 그 임명권자 또는 임명제청권자에게 당해 사법경찰관리의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했다.이는 가정폭력에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여성의 피해를 유발시키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경찰청은 “사소한 부부다툼에까지 경찰 개입을 증가시키고, 형사입건등 현장 경찰관들의 과잉대응 및 무리한 법적용으로 전과자를 양산하는 불합리한 조항”이라며 반박한 바 있다.이번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가정폭력의 경찰개입에 대해 다시한번 적잖은 논란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