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지상주의가 판치는 나라, ‘한국형 리플리 증후군’ 키웠다

거짓말로 시작된 범죄

2014-04-21     오두환 기자

사회 유명인사들도 리플리 증후군에 빠졌다
내가 만든 가상세계서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20대 A모씨는 6년 동안 명문대 신입생 행세를 하면서 48개 대학을 다녔다. A씨는 다수의 학교 동아리와 MT 등에 참석하며 친구들을 만났고 캠퍼스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A씨는 신입생이 아니었다. 실제 학생의 이름을 도용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A씨는 한 신입생의 신상정보를 알아낸 뒤 해당 신입생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협박한 후 자신이 그 학생을 대신해 학교에 다녀왔다. A씨는 전형적인 리플리증후군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증후군, [일요서울]에서는 리플리증후군이 무엇인지, 왜 생겨나는지 등을 심층 분석해 봤다.

리플리 증후군은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따온 말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 인격장애를 뜻하는 용어다.

소설 속 주인공 톰 리플리는 20대 중반의 고아로 절도와 남 흉내내기가 특기다. 그는 어떤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는 부자 아버지를 둔 덕분에 무위도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구를 죽이고 신분을 위조해 그 친구 행세를 하면서 산다.

리플리 증후군은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많이 발생한다.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개인이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중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이를 현실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열등감·피해의식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해

리플리 증후군은 아침에는 평온한 상태로 지내다가도 저녁이 되면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로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보이는 등,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서 잘 나타난다. 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 보지 못한 경우에도 생길 수 있다.

A씨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과거 친구의 아버지가 ‘재수했는데 왜 그 대학밖에 못 갔냐’는 말을 듣고 큰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또 그는 “신입생에게 주는 애정과 관심이 좋았다. 누구한테 사랑받고 누가 나를 챙겨주고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중1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왕따를 당했다.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며 “내가 명문대를 다닌다고 하면 시선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A씨는 친구 아버지 말에 상처를 받은 뒤 편입 시험을 봤지만 그마저도 실패했고 결국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해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A씨는 유명 사립대학 교수인 아버지를 비롯해 4명의 누나들이 모두 서울권 명문대에 진학해 학벌에 대한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약물치료 가능 치료기간은 길어

리플리 증후군을 진단받은 환자는 심리상담이나 면담 등 정신치료 위주의 치료법과 약물치료를 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히스테리성 성격장애의 한 유형으로 치료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완치라는 개념도 불문명하다.
한편 정신과 전문의들은 리플리증후군에 대해 “이미 자신의 의지를 벗어났다. 이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거짓말이 습관처럼 반복되고 지속되면 자기도 모르게 이 거짓말을 사실로 믿게 된다”며 범죄의 위험성을 경고 했다.

‘학력위조’ 밝혀진 신정아·윤석화·이현세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과거 신정아씨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을 보도하면서 ‘재능있는 신씨’라고 지칭했다. 당시 인디펜던트는 엄연한 증거가 있음에도 학력위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뉴욕으로 ‘도피’한 신씨가 정말 자신이 만든 이력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리플리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학력을 위조했던 연극배우 윤석화씨, 만화가 이현세씨,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창하씨도 모두 리플리증후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위조된 학력을 사실인양 행동해 왔다. 비록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A씨를 비롯해 앞서 언급된 사람들 모두 ‘학력위조’를 기본으로 한 리플리증후군 행동을 보였다. 학력지상주의가 판치는 우리나라의 병폐에 기인한 ‘한국형 리플리 증후군’ 환자들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처럼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는 없다. 학벌 하나로 그 사람의 능력과 미래가 정해지는 나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주소다.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