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계급사회’ 세종시를 가다

부모 공직 직급따라 자녀 서열화…

2014-04-21     오두환 기자

 새벽 출근 셔틀버스가 취침 버스…이주율 안올라
공무원들 사이서 떠돌던 ‘세종시 공포증’ 현실화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2012년 7월 1일 ‘행복도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출범한 세종시가 아직도 ‘불행도시’ ‘세베리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당초 ‘모두가 꿈꿔왔던 최고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야심차게 정부청사를 이전하고 도시를 만들어 왔지만 그 계획을 이루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전망이다.

세종시로 출근을 시작하면서 새벽 5시에 기상하는 것은 필수다. 피곤한 몸으로 알람 소리를 듣고 제 시각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지만 늦으면 출근길이 고생이니 어쩔 수 없다. 잠든 아내가 깰까 조심조심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다. 5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노원역에서 6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탈수 있다.

다른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월요일이면 이 셔틀버스도 좌석이 없다. 셔틀버스에 사람들이 가득 차자 버스가 출발한다. 같이 탄 사람들을 보니 목베개를 꺼내는 사람도 있다. 이제부터 셔틀버스는 본격적인 취침버스로 변한다. 정부세종청사까지는 빠르면 2시간에서 늦어도 3시간이면 도착한다. 부족한 새벽잠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지만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자는 게 편할 수는 없다.

세베리아를 아시나요?

김모씨는 지난해 12월 2단계 정부청사 이전 때부터 서울과 세종시 출퇴근을 시작했다. 부처 이전과 함께 이사를 온 동료들이 많지만 김씨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출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를까 165대의 통근버스가 있으니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다.

현재 정부세종청사에는 1만여 명의 공무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정부 계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공무원들도 있고 국가적 사명감으로 내려온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근무·생활 환경이 좋지 않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정부세종청사는 공무원들이나 기자들 사이에 ‘세베리아’라고 불린다. ‘시베리아처럼 허허벌판’이라는 뜻이다. 청사 이전 초기보다는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직접 피부에 와 닿을 정도는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서울보다 공기는 참 좋다”고 말한다. 공기 빼고는 교육시설, 문화시설 등 모든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전세 값이 수직 상승하는 가운데 세종시 만은 반토막이다.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지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전용면적 85제곱미터하는 아파트 전세값이 1억대 초반이지만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그만큼 공무원들의 이주율도 낮다. 솔로인 공무원들과 달리 가정을 둔 공무원들이 이주를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셔틀 아니면 안돼요

점심시간만 되면 정부세종청사 입구에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버스들이 즐비하다. 인근 지역인 첫마을, 대평리, 조치원, 공주시 등 식당가로 가는 버스들이다. 청사 내에 구내식당이 있지만 사람도 많고 복잡해 밖으로 나가는 공무원들이 많다. 청사주변에는 아직 식당이 많지 않다. 이 셔틀버스를 놓치면 자가용이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택시값은 손님을 맞아야 하는 식당에서 내기도 한다.

이동시간을 제외하면 공무원들이 정작 식사시간으로 소비하는 시간은 20분 남짓이다. 아침 출근길도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때도 버스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디 이뿐인가 이렇게 공들여 찾아간 식당들의 음식값도 저렴하지는 않다. 이래저래 불만이 쌓여만 간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일 보건복지부에 근무하던 20대 여성 사무관이 첫마을 오피스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무관은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도 기획재정부의 여성 사무관이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자살한 바 있다.

물론 이들의 자살이 세종시 이전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세종시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겪는 외로움, 불편함, 불안감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짐작할 수 있다. 가족·연인과 떨어져 지내야 하고 각종 보고, 출근 등의 이유로 수시로 서울을 오가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세종시는 신 계급사회

각종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는 세종시에 ‘신계급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공무원인 부모를 따라 세종시로 이주한 아이들 사이에서 부모의 직급·계급에 따라 노는 부류가 갈리면서 왕따 아닌 왕따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정부청사 이전 전부터 제기돼 왔던 문제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세종시 포비아(공포증)’라며 떠돌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당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세종시에 내려가 공무원끼리 몰려 살면 학교에서 본인 자녀들이 본인의 직급때문에 위축될까 봐 우려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군대에서 남편 계급이 곧 마누라 계급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주무관은 “공동생활에서 직급에 따라 식구들도 서열화될 것 같아 아파트는 전세를 놓고, 세종시와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지난해 세종시로 이사를 와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 강모씨는 “학교에 고위 공무원을 비롯해 일반 공무원들이 많다보니 이질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또 아이들끼리 우리 아빠는 어디서 근무한다, 너희 아빠는 어디서 근무하니, 몇급이야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가다 보니 아이들도 모르는 사이 직급·계급을 비롯한 부모의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며 “친구의 부모보다 자신의 부모 직급이 낮은 아이는 자연스럽게 위축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누구의 엄마·아빠가 몇 급 공무원이라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어른인 나도 신경이 쓰이는데 아이들은 더 심할 것”라고 말했다.

청사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최모씨도 “처음 이주를 하고 나서 아이가 왕따 때문에 힘들었다. 물론 부모의 직급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에 대한 정보는 언제든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5월 언론에는 정부세종청사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아이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어린이집 한 교사의 부모가 고위공직자 신분을 내세워서 공무원인 아이의 부모를 협박했다고도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교사는 아이를 폭행한 사건과는 무관했고 고위공직자였던 부모 또한 사실 확인을 요구했을 뿐 협박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됐지만 앞선 사례와 같은 일은 세종시에서 다양한 형태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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