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담당 검사 일문일답] “조사나간 경찰이 쫓겨나는 등 외압 있었다”

2014-03-31     이지혜 기자

[일요서울 | 이지혜 기자] ‘형제복지원’사건에 대해 당시 담당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보다 더 자세히 알고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 변호사에게 이 사건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중요한 사건이다. 다음은 김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형제복지원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됐나.
-울산지청에 근무 중이던 1986년 12월 21일 사냥꾼과 같이 야산으로 사냥을 나섰다. 그때 사냥꾼이 산 속에서 이상한 작업장을 발견했는데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경비원들이 제대로 일을 안 하는 인부들을 때린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현장으로 달려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건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느낌이 왔다. 다음날부터 내사를 시작했다.

▲수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
-이상한 작업장이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는 것을 알고 부산시에 문의하니 그곳은 부랑인 수용시설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다. 1987년 1월 16일 공식 수사를 시작하고 형제복지원에 압수수색을 하러 갔다. 크기가 엄청난 철문이 복지원 앞을 막고 있었는데 교도소 같이 보였다.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증거를 입수하면서 수사를 진행했다.

▲형제복지원은 어떤 시설이었나.
-70년대 중반에 만들어져 국가로부터 지정을 받은 사회 복지 시설이었다.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시설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1985~1986년에 39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중간에 복지원에서 감금당했다고 신고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무고죄로 처벌을 받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사람들을 납치한 이유는.
-수용인원에 따라 지원금이 지급됐다. 수용인원이 늘어나면 지원금도 증가하는 방식이었다. 원장 입장에서는 수용인원이 늘어나면 지원금은 물론이고 노동력도 늘어나기 때문에 원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마침 전두환 정권에서 부랑인과 거지는 몽땅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 틈을 타 복지원에서 멀쩡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간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외압이 있었다.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정도였다. 부산 형제복지원 본원에 수용된 3000명 전원을 조사할 계획을 짜고 경찰들을 보냈지만 전부 쫓겨났다. 또 부산지검에 매일 수사기록을 가지고 보고를 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그러나 하루 종일 대기시켜놓고 “바쁘니 내일오라”는 식으로 수사를 방해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시장으로부터 직접 전화도 걸려왔다. 부산시장은 나에게 “형제복지원 원장을 즉시 석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수천 명이 관리가 되지 않아 큰일난다”고 말했다. 검찰, 정치인 가리지 않고 외압이 들어왔다.

▲당시 검찰 윗선들은 현재 어떤 요직에 있나.
-지금은 모두 퇴직한 상태다.

▲박인근 원장이 횡령혐의만 인정됐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박인근 원장을 특수 감금죄로 기소했다.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유죄로 인정을 했으나 대법원에서 정당한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고등법원에서 다시 유죄라고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오자 결국 고등법원은 판결문에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으니 하급심인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정권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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