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만화가 오성 방기훈 작가

신작 ‘명동예인천하’로 예술문화의 거리 부활을 꿈꾸다

2014-03-24     김종현 기자

어릴 적 만화가 꿈이 부산 피난길에 단행본으로 등단
시인·소설가·언론인 등 다양한 변신으로 세상과 소통

 

[일요서울 | 김종현 기자] 반세기에 가까운 삶을 만화가로 살아온 오성 방기훈 작가가 명동·충무로 예술의 부활을 꿈꾸며 20여 년 만에 새 만화작품으로 독자들 앞에 나선다. 지난 20여 년간을 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호홉해 왔다는 방기훈 작가, 이젠 만화가 열정의 출발점이었던 만화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의 56년간의 만화인생을 만나본다.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길에 올랐던 방기훈 작가는 18세(1958년)에 부산국제시장에 있던 한 만화출판사를 통해 ‘천하무적 왕방울’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19세 되던 이듬해 서울 마포 염리동으로 올라와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방 작가는 1960년 월간 아리랑 신인만화가상을 수상,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다양한 작품활동에 들어간다. 이후 그는 인기 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성인만화 ‘죠스’를 연재하는 것을 비롯해 벤허·푸른날개·강감찬·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최후의 목격자 등 여러 단행본 작품으로 독자들과 소통해 왔다.

유난히 만화를 좋아했던 방 작가는 학창시절 시험지 뒷면에까지 만화 스케치를 할 정도로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특히 초등학생 시절, 서울 중구 인현동(현 을지로동)에 살았던 당시 충무로는 대한극장, 국도극장 등이 있어서 연극과 창극(여성국극) 등 다양한 예술공연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는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단초가 됐다고 상기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국도극장 담이 나무판자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몰래 숨어 들어가 공짜구경을 많이 했다”면서 “종종 극장 문지기에게 들켜서 혼쭐이 났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예술가 거리 명동 지금은 시장 통으로 전락

방 작가가 추억하는 명동은 어떤 곳일까. 방 작가는 몇 년 전 예술가들이 넘쳐나던 옛날 명동을 추억하며 구석구석 골목마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시장 통으로 바뀐 것 같아 아쉽다”면서 “1960년대 초 스케치북 한 권만 들고 명동 뒷골목을 뒤지던 시절에는 주점들, 심지다방, 세시봉 등 예술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음악다방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대신 술도 얻어먹었다”고 추억했다.

그는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리는 것밖에 없었다. 캐리커처를 그려주면 술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있었다”며 “그때는 그게 소통이었고 다양한 예술의 열정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명동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 작가의 기억은 새 작품의 소재로 명동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새롭게 선보일 명동이야기에 대해 그는 “‘명동예인천하’는 명동과 충무로 일대 예술인들의 애환과 사랑, 정의감 등을 파노라마처럼 엮을 예정”이라며 “내가 어릴 적부터 동경하고 봐왔던 명동의 모습을 다양한 이야기와 사건으로 재조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890년대 말부터 현대를 오가는 구성으로 소파 방정환, 김좌진 장군, 김두한 등 시대적 다양한 인물들로 재구성해 명동의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더불어 방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명동·충무로의 예술문화를 복원시키기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면서 “옛날의 정취를 잊지 못하고 있는 예술인들과 상인들, 또 이곳에서 정치하는 정치인들이 합심해서 명동·충무로를 가꾸는 데 힘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바람을 나타냈다.

다양한 분야 진출에도 작품 열정 식지 않아

재차 ‘작가’를 강조한 그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화백이 아니다. 지금은 어딜 가도 화백으로 부르는데 만화로 스토리를 그리기 때문에 작가가 맞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방 작가는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항상 돈 문제로 작품 하는 데 어려웠다. 56년간 만화를 그렸지만 어려운 살림에 여기 저기 이사를 다니느라 작품을 거의 보관하지 못했다”며 “제대로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노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예술가들이 예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권에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만화 이외에도 방 작가는 다양한 분야로 자신의 시각을 넓혀 왔다. 1980년대 들어서는 만화보다 풍속화 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또 1998년에는 월간 ‘시와 시인’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같은해 월간 ‘한맥문학’으로 소설에 등단해 문인으로서의 길도 걷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대중언론문화연구원 사무총장을 비롯해 나라꽃무궁화백만그루심기 국민운동중앙회, 코리아웹툰작가연합총회 회장, 명동예술인총연합회 창립발기인 공동대표 및 사무총장 등 다양한 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해왔다.

이에 대해 방 작가는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만화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게 참으로 좋았다”며 “20여년 사회단체 활동에 전념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에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지만 이제는 만화가의 길을 다시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만화 창작 활동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놨다.

방 작가는 “우물 속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면 넓은 세상에 폴짝 폴짝 뛰어 다니느라 바쁘다. 그러다가 나왔던 우물을 못 찾게 된다. 이제는 만화가의 우물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몇 년간 작품을 구상해 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일요서울을 통해 다시 내 우물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오성이라는 이름이 쉽게 부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깨달을 오자와 깨달을 성자가 들어 있어 깨닫고 또 깨달으라는 깊은 뜻이 있다”며 “인생의 좌우명처럼 마음속에 새기며 산다. 이번 작품에서도 또 다른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todida@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