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개발천국 대한민국…남아 있는 유적·유물이 없다”
#12. 공사 중 수습·보존된 유물 몇 건에 불과
우리나라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개발에만 주안점을 둬 개발천국이 됐다. 선진국에서는 자연과 문화유산 보존에 주안점을 둔다. 개발할 곳이 있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조사해 그곳이 과연 개발해도 되는가를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 시행한다.
나는 몇 십 년 전부터 수차례 일본 후쿠오카의 지하철 공사현장을 목격하고 그 진척사항을 들은 적이 있다. 공사장에 아무리 작은 유적이라도 발견되면 그 큰 공사가 전부 중단이 됐다. 그 유적을 조사하고 발굴하는데 몇 달이 걸려서 모든 중장비가 쉬어야 한다. 막대한 예산이 재투자 돼야 하고 공사에 막대한 차질이 있는데도 언론에서는 발굴조사 상황만 보도하고 조사반대 기사가 없다. 또 데모도 없고 평온하다.
서울 지하철은 서울의 교통난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계속 그 역할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서울과 그 근교는 이전 선사시대로부터 백제·신라·고려·조선시대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간 인문의 중심지다. 또한 2000년간 수도로서 그 지상과 지하에 우리민족의 수많은 문화유적과 유물이 층층이 쌓여있는 우리문화유산의 보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지하철 공사 중에 유적이 발견돼 조사가 진행되거나 수습·보존된 사례는 불과 몇 건에 불과하다.
만일 지하철공사 현장에서 제대로 문화유적과 유물이 조사·수습·보존됐다면 선사시대부터 조선조까지의 우리 역사문화를 밝힐 수 있는 방대하고 막중한 문화유산이 살아남아 우리의 역사문화를 밝히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를 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했다면 지금쯤 수 백 군데에 역사문화공간이 탄생했을 것이다. 또 수십 개의 대규모 박물관이 세워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두는 사라져 없어졌다.
지하에 매몰돼 있던 문화유적 외에도 지상에 그 흔적이 남아있던 우수한 문화유산도 개발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사라진 유적 몇 곳만 꼽아보아도 마구잡이 개발과 문화유적·유산 경시 풍토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과 민족 반역자적 행태를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한강유역 유적·유물 대부분 멸실·훼손
한강유역에는 그러한 유적이 상당히 많았다. 선사시대 유적은 암사동에 있다. 지금 도시화돼 고층건물로 꽉 들어찬 암사동 일대는 수백만평이 넘는 드넓은 사초지의 한강유역이었다. 여기 선사시대부터 백제초기 문화유적과 문화유산이 무수히 지하에 있었다. 지금 송두리째 없어지고 1000여 평 정도의 암사동 선사 주거지 전시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전시관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만 보존되고 제대로 조사 발굴됐다면 생생한 유적과 유물이 수습·보존됐다면 세계적인 문화유적지가 됐을 것이다.
송파구 석촌동 유적, 풍납동 유적, 몽촌토성 유적, 아차산성 유적 등은 그나마 일부나마 남아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풍납동 유적은 매우 중요한 백제시대의 성내도시 유적이다. 일찍이 풍납토성으로 지정됐지만 토성이 자꾸 침식하고 있다. 성내는 근대도시로 꽉 들어차 지상과 지하의 유적유물 파괴가 극도에 달했다.
토성 내 일부 도시를 철거하고 조사 발굴을 한 결과 매우 중요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돼 세인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풍납토성과 그 안의 유적이 그대로 살아있었다면 백제의 문화가 밝혀지고 당시 신라·고구려와의 관계도 밝힐 수 있는 역시 세계적 문화사적이 됐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 문화 역량이 세계에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지금 워커힐 언덕 쪽의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도 많이 파괴 훼손됐지만 근년조사에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상당량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사가 됐다. 송파의 석촌동에는 매우 중요한 백제의 유적이 있었다.
그러나 왜인들이 거기에 절을 지어 1차 파괴했다. 해방 후에도 방치해 거의 파괴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러한 중요 유적지를 거론하자면 전국적으로 수백 만 건이다. 하지만 개발로 인한 인위적인 파괴와 멸실 훼손을 면한 곳은 아주 드물다.
충청도 연기일대인 지금의 세종시는 백제이래의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매장돼 있던 곳이다. 하지만 정치가들과 주민들이 합심해 지하의 유적과 유물을 도륙한 곳이다. 수 천 만평의 광활한 산야의 지상과 지하에 소재했을 수많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를 단시일 내에 형식적으로 끝마치고 도시가 들어선 것이다. 정치가의 권력야욕과 지역주민의 이기주의가 민족 적 문화유적과 유물을 불도저로 일거에 짓밟고 만 것이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김두량 월야산수도
김두량은 대대로 화원집안 출신이면서도 그의 그림은 자신의 의중을 나타낸 역량있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북종화적인 면모가 많으나 남종화풍과 서양화풍도 받아들인 앞으로 매우 주목 할 만한 화가이다.
월야산수도는 그림 좌상에 갑자중추김두량사(甲子仲秋金斗樑寫)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나이 49세 때 그림이다. 팔월 중추인데 만월의 둥근달이 떠있는 것을 보면 팔월 보름날이면서 안개 낀 황량하고 스산한 산중계곡을 그렸다.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대보름 가을밤의 산이 지니고 있는 어떤 깊은 뜻일 것이다.
작가의 가슴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좌하에 낮은 언덕이 있을 뿐 산의 배경 없이 해조묘법으로 그린 나무들을 주로 하고 물이 흐르는 낮은 계곡과 절묘한 포치의 안개만으로 이만큼 가을밤의 특별한 정취를 그윽하면서 생동감 있게 나타내기란 비범한 화가가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