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훈아 형님은 모창가수의 대부였다”
행사 한 건에 100만원, 많으면 한 달에 40~50건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지난 1월 12일 나훈아 모창가수 너훈아 김갑순(57세)씨가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서 별세했다. 김씨는 모창가수 1세대였다. 모창가수들 사이에서는 ‘대부’로 불릴 정도로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간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비록 모창가수이긴 했지만 김씨는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후배들 또한 그를 ‘진정한 가수였다’고 말한다. [일요서울]에서는 고 김갑순 장례식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모창가수 태지나(본명 윤찬)와의 인터뷰를 통해 고인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와 모창가수들의 애환에 대해 들어 봤다.
‘진짜’ 가수가 되고 싶은 모창가수들
모창가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짝퉁’
“너훈아 형님과의 인연은 1983년 인천 간석오거리 부근에 있던 공항스탠드바에서 시작됐다. 당시 나는 스탠드바 MC였고 형님은 출연가수였다. 형님이 출연 오디션을 보러 오면서 처음 만났고 이후 형님과는 의형제처럼 지냈다”
태씨는 너훈아와의 첫 만남에 대해 말하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태씨와 너훈아와의 만남은 30년을 넘겼다. 비록 중도에 오해가 있어 서로 연을 끊기도 했지만 너훈아와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함께했다. 고인이 된 너훈아의 마지막 공연은 지난해 12월 24일 있었던 은평구 은혜로운집 크리스마스 이브행사였다.
당시 태씨는 너훈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행사 출연이 어려울 경우 대신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태씨는 “최악의 상황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던 상태의 형님이 은혜로운집 아이들과 관계자가 너훈아를 너무 보고 싶어한다는 말에 몸에 호스를 차고 올랐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 수 없어 MR을 틀었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후 너훈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1월 초 아픈 몸을 이끌고 아내 그리고 태씨와 함께 파주의 한 펜션에 들렀다. 기분전환도 할 겸 쉬기 위해서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펜션에 노래반주기가 있었다. 형님이 그걸 보더니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날 형님이 부른 노래가 ‘눈이 내리네’라는 샹송이었다” ‘눈이 내리네’는 너훈아가 육성으로 부른 마지막 노래가 됐다. 진정한 가수가 되고 싶었던 너훈아는 마지막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간암3기 판정 받고 공연 다닌 너훈아
태씨에 따르면 너훈아는 2011년 순천향병원에서 간암3기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만 당시 친하게 지냈던 개그맨 엄용수 만이 투병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태씨는 시간이 지난 뒤 엄용수에게 이 사실을 들었다.
“형님은 투병사실을 숨긴 채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항암치료를 받았다. 보통 10일 정도 치료를 받으면 2달 정도는 거뜬하게 행사를 다닐 수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내가 형님의 도움을 받았다”
태씨는 너훈아와 함께 서울코리아나 소속 전속가수다. 태씨는 너훈아에 비해 덜 유명했지만 너훈아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너훈아를 대신해 행사를 뛰게 됐고 그렇게 해서 쌓인 인기 덕분에 지금의 태지나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형님은 노래에 대한 열정이 정말 강했다. 그렇게 아픈 상태에서도 낮에 행사를 뛰고 저녁에는 밤무대까지 나갔다. 사실 밤무대 행사는 안 뛰어도 되는 상황이지만 다음날 스케줄이 없으면 형님은 무조건 밤무대를 나갔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만큼 노래를 좋아했다.
하지만 결국 그 열정이 형님을 쓰러지게 한 것 같다”태씨는 너훈아가 너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결국 쓰러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낮에 있는 행사는 상관없지만 밤무대 행사장은 대부분 공기가 좋지 않고 늦은 시간에 있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모창가수 전성기는 1990년대
태씨에 따르면 너훈아는 한달 평균 40~50개 행사를 다녔다. 보통 행사비가 1건당 적게는 100만원에서부터 300만 원 선이었으니 수입도 괜찮았다. 이에 비해 태씨는 보통 한달 평균 20~30개 내외의 행사를 다녔다. 모창가수 중에는 적은 편이 아니다.
너훈아의 전성시대는 90년대부터였다. 1989년 ‘명사십리’란 트로트 곡을 내기도 했지만 반응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고 김형곤이 ‘너훈아’라는 예명을 지어주면서부터 모창가수의 삶이 시작됐다.
너훈아는 ‘모창가수의 대부’로 불린다. 너훈아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수많은 모창가수들이 나오지 못했고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태씨는 “후배 모창가수들은 형님에게 정말 감사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형님의 덕이다”라고 말했다.
태씨를 모창가수의 세계로 이끈 것도 바로 너훈아다. MC였던 그에게 태진아 모창을 제안한 것이 너훈아다. 태씨는 너훈아가 롤모델이었다. 노래에 대한 열정은 물론 사람을 대하는 모습까지도 그를 벤치마킹했다.
태씨에 따르면 너훈아는 유독 사람들에게 친절했다고 한다. 행사장 관계자나 팬들은 물론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조차 친절했다고 전했다.
짝퉁 이미지는 태생적 한계
모창가수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짝퉁’이라는 이미지다. 모창가수들의 태생적 한계다. 고인이 된 너훈아도 그랬고 태지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창가수들 다수가 자신의 곡을 갖고 있다. 태씨는 지난해 11월 ‘스리슬쩍’이라는 트로트 곡을 발표했다.
자신의 곡을 갖고 있는 가수와 그렇지 않은 가수는 천지차이다. 자신의 노래가 없다면 ‘영원한 모창가수’지만 자신의 노래가 있다면 가수가 된다.
현재 국내에는 많은 모창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1992년도에는 모창가수협회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약 50여명의 모창가수들이 회원으로 있었지만 회장을 맡았던 너훈아가 별세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는다.
태씨는 사분오열된 모창가수들에 대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도와가며 하나가 되어도 부족한 세상인데 자신들의 이익만 쫓는 모습에 가끔은 할 말을 잃는다. 이번에 형님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방송에 나와서 오버하는 모습을 보자니 화가 날 정도였다”고 했다.인터뷰 내내 태씨는 “모창가수계의 대부가 갔다”고 말했다. 고인이 된 너훈아의 빈자리가 너무나 큰 탓이다.
태씨와 후배 모창가수들은 너훈아의 묘지 앞에 노래비를 세웠다. 노래비에는 고인의 노래인 ‘명사십리’가사가 적혀 있다. 너훈아의 유언이기도 했지만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을 기리기 위해서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진정한 가수이고 싶었던 ‘너훈아’ 김갑순. 그의 노래와 함께 환하게 웃는 얼굴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어 아쉽다.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