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행수입 활성화, 가격 거품 확 빠진다
한국에서만 비싼 수입품, 이젠 옛말?
소비자 지갑 열까 주목…유통업 지각변동
업체 별 상반된 반응…웃고 우는 자 누구
한국에서만 유독 비싸게 팔리던 해외 수입품 가격 거품이 오는 3월부터 사라질 전망이다. 정부가 제조사가 아닌 현지의 대형 할인점이나 도매상, 인터넷쇼핑몰 등에서 물건을 대량 구입하는 병행수입을 활성화하기로 한 것이다. 또 수입가격 공개 의무화 법안도 발의됐다. 가격 거품을 없애고 소규모 사업자가 독점 수입상과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설명이다.
병행수입 활성화의 가장 큰 효과는 해외 유명 브랜드 의류나 화장품, 식품 등을 최대 50%까지 싸게 살 수 있고 가격 거품을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랄프로렌 코리아’와 ‘스토케코리아’ 등은 지난해 병행 수입품과의 가격경쟁을 위해서 가격을 인하하기도 했다.
병행수입 활성화 소식이 알려지자 소비자들은 “드디어”라는 말로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그동안 소비자들은 같은 제품도 국내에서는 더 비싸게 판매돼 가격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수입 의류나 화장품은 동일 제품 대비 2~3배, 수입 비타민은 7배까지 비싼 값에 판매돼 늘 논란이 됐다.
일례로 ‘키플링’ 가방은 미국에서 99달러로 약 10만 원이지만 국내에서는 19만 원대에 판매된다. 고급 유모차로 인기를 끈 스토케 역시 100만 원이 훌쩍 넘지만 현지에서는 이보다 30% 낮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 페라가모의 소피아백은 국내 평균 판매가격이 230만 원 정도지만 해외 평균 가격은 177만 원이다. 무려 55만 원 정도 차이가 난다. 어그 양털부츠도 국내에서는 24만여 원에 팔리지만 병행수입 제품을 파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12만여 원에 판매됐다. 같은 제품인데 절반의 가격으로도 구매가 가능한 것이다.
식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의 1㎖당 가격은 한국 41.3원이지만 미국과 일본은 각각 4.3배, 2.1배 낮은 가격에 판매된다.
이렇다보니 지난해 12월 미국 블랙프라이데이 때는 국내 소비자들의 해외 직구(직접구매)족들의 열풍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황으로 소비자의 가격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보다 싸게 살 수 있는 경로를 능동적으로 찾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해외 직구를 알게 된 소비자들은 “그동안 ‘호갱(호구와 비슷한 말로 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말하며 한탄하기도 했다.
때문에 병행수입이 활성화되면 그동안의 소비구조에서 소비자들이 대거 이탈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미 병행수입으로 할인된 가격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대형 할인매장, 아울렛 등으로 몰리는 소비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 한 대형 할인마트에서 캐나다구스, 몽클레르, 노스페이스 등 유명 패딩점퍼를 병행수입으로 20~30 % 싼 가격에 팔자 준비된 800벌이 4일 만에 동났다.
사실 병행수입은 이미 1995년부터 합법화돼 있었다. 하지만 국내 독점 판매권을 가진 업체들이 병행수입품을 불법 취급해 활성화되지 못했다. AS 거부, 자신들의 판매 제품에만 ‘정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기대 큰 만큼 효과 있을까
유통업계는 올해 병행수입 시장의 규모가 약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마냥 장밋빛 앞길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AS를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없고, 시장의 규모가 작다는 문제점도 있어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
현재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업체들은 병행 수입 물품에 대한 방침의 변화가 없을 예정이다.
대다수 해외 수입품 매장 관계자들은 “병행 수입이 되더라도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좀 더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을지라도 우리 회사 물건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어떤 서비스도 할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처럼 AS가 불가한 상황 때문에 해외에서 고급 유모차를 병행 수입하는 일부 인터넷 쇼핑몰은 아예 새 제품의 부품을 떼어내 고장난 제품을 고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유통업계 내부에서는 병행 수입을 두고 양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형 할인마트, 소셜커머스, 오픈마켓 등에서는 병행수입 활성화를 반기고 있지만 독점권을 갖고 있던 업체와 백화점에서는 대규모 소비자 이탈 현상이 우려되는 모양새다.
그 때문에 일부 브랜드들은 병행수입과 직구를 원천 봉쇄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미국 의류브랜드 아베크롬비앤피치는 지난해 11월 한국지사를 설립해 병행수입 매장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있다. 폴로와 랄프로렌은 국내 인터넷 사용자의 온라인 쇼핑몰 접속을 차단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백화점 역시 병행수입을 반기는 눈치는 아니지만 아직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다. 명품 등 해외 패션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은 가격 변수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병행수입 업체가 취급할 수 있는 품목과 물량이 제한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신상품이나 인기 상품 구비에 대해서는 현재보다 강화할 예정이다.
병행수입을 반기는 쪽인 대형마트와 소셜커머스, 오픈마켓 등은 상품 기획자(MD)가 직접 구매하는 품목을 확대할 계획이다.
100여 개의 병행수입 브랜드를 판매하고 있는 이마트는 병행수입 품목을 120여 개로 확대할 예정이다.
2011년 매출 100억 원에서 지난해 600억 원까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만큼 올해 매출 목표는 800억 원대로 잡고 있다.
2009년 12개 브랜드로 병행수입을 시작한 롯데마트는 올해 판매 브랜드를 70여 개로 늘려 350억 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관세청에 143개 해외 유명브랜드에 대해 병행수입을 신청했으며 직접 거래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롯데마트는 51개 브랜드 200여 개 품목을 판매해 2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처럼 더 이상 ‘호갱’이길 거부하는 깐깐한 소비자들의 증가와 병행수입 확대라는 유통시장의 변혁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유통업계 구조 재편이 어떻게 이뤄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