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백사마을, 변화가 시작된 괭이부리마을
도심속 판자촌 사람들을 찾아서
주인 없는 빈집, 가파른 비탈길… 곳곳이 위험지대
좁은 집에서 아직도 연탄보일러 사용하는 사람들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백사마을은 젊은이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서울의 중심지가 아닌 데다가 빈민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고층 빌딩들이 가득한 서울 시내에 빈민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다.
중계동 104번지에 위치해 ‘백사마을’이라 불리던 곳. 이 마을은 1976년 정부가 서울 도심 개발을 위해 용산, 남대문, 청계천, 안암동 등의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백사마을은 조선시대 때부터 존재해왔다. 당시에는 불암산이 울창한 숲으로 이뤄져 있어 ‘무시울’ ‘무수동’으로 불렸다. 현재 동서남북 약 500m 공간에 1500여 세대 약 3000여 명이 살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백사마을에 가려면 지하철 4·7호선 노원역이나 1호선 창동역에서 1142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버스 편이 더 편하다. 백사마을은 종점에서 곧장 시작한다. 종점에서 내리면 왼쪽으로 마을이 시작하는데 한눈에 봐도 이곳이 백사마을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폭이 좁은 길을 사이로 지붕이 낮고 허름한 판잣집, 쪽방집들이 비닐포장으로 어지럽게 덮혀있다. 너무 오래 돼 폐가로 보이는 집은 물론 창문이나 출입문의 유리가 깨진 집들도 많다. 길가에는 연탄재와 오래전 생활용품들이 늘어져 있다.
불과 100m 아래의 풍경과 너무나 다르다. 추운 날씨 탓인지 길가에는 간간히 자동차만 다녔다. 집안에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나이든 주민들도 잠시 앉았다가 곧장 집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다.
백사마을은 산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비탈길이 가파르다. 땅을 개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이 조성된 듯 집과 집 사이 간격이 1m도 채 되지 않아 골목길은 성인 1명이 드나들기에도 비좁다. 집은 8평 정도가 기본이다. 평수만 작은 게 아니라 높이도 낮아 성인이 서 있기도 힘든 집들이 많다. 마당이 있다고 해도 방보다 작은 크기다.
세월이 흐르면서 빈 집을 허물고 새로 크게 지은 집도 있지만 맞은편 아파트 단지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 걷다보니 방 창문이 무릎 아래에 닿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문인지 화장실 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오래된 문들이며 슬레이트를 각종 천으로 덮어놓은 지붕은 ‘정말 이곳에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방앗간과 미용실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연탄보일러에서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주유소 배달차가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다. 드문드문 어린이용 자전거도 보였다. 대부분 장년층이 외롭게 살고 있지만 어린 아이를 둔 가족도 있었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 중에는 해방, 전쟁, 개발 모든 것을 다 겪은 사람도 많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경에 옛 추억이 떠오른다고 좋아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오래도록 지지부진한 재개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새해라고 각종 음식과 생필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는 것도 잠깐이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야 크지만 이곳 주민들에게는 그마저도 일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보금자리주택 들어선
괭이부리마을
백사마을이 불암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인천 괭이부리마을은 인천항 만석·화수부두와 만석동 9번지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괭이부리마을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이 마을은 1900년대 초만 해도 20∼30가구만 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 일본이 부두건설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를 지으면서 거주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6·25 때는 피란민이 몰려와 판자촌이 더욱 커졌다. 이후 만석부두와 화수부두에선 어부들이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을 즉석에서 사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조그마한 어항으로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원주민들이 속속 떠나면서 빈집이 늘어났고, 노후주택 증가로 인해 건물붕괴, 화재 등의 안전사고 위험이 큰 곳으로 분류되고 있다. 괭이부리마을은 백사마을에 비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비록 열악한 주거환경은 별 차이가 없어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지난 12월 2일 인천시가 국비와 시비 110억 원을 들여 보금자리주택 98가구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63년 만의 변화다.연립주택 2채로 구성된 보금자리주택은 가구당 면적이 18∼38㎡에 불과하다. 하지만 단칸방 판자촌에서 생활하던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럽다. 재개발사업으로 지은 새집의 주인도 100% 원주민들이라 더욱더 의미가 있다.
과거 판자촌 시절에 주민들은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하지만 보금자리주택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설치돼 있다. 공동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보금자리주택에 들어가지 못한 판자촌 주민들은 만석부두와 화수부두 사이에 있는 두산 인프라코어 공장 담벼락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옹기종기 벽도 없이 붙어있는 판자촌 사람들은 지금도 비좁은 방에서 연탄보일러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부두 쪽 판자촌 사람들의 연초는 썰렁함 그 자체였다. 보금자리주택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했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부두는 밤이나 낮이나 분주하다. 하지만 판자촌 사람들에게 어둠은 일찍 찾아온다. 초저녁부터 판자촌은 고요했다. 소설 속에 나왔던 아이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가정집에서 들리는 그 흔한 텔레비전 소리도 듣기 어려웠다. 멀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없었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