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2013 “응답하라! 대한민국!”

대학가에 부는 ‘안녕’ 현상 진단

2013-12-23     이지혜 기자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전국 대학가에 ‘안녕’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12일 고려대 학생이 붙인 대자보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타 대학에도 번진 것이다. ‘부정선거 의혹’, ‘민영화 반대’ 등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확산’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안녕 하느냐”는 대자보의 글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지금은 고등학생, 대학교수, 사회인까지 ‘안녕’ 열풍에 동참했다. 그러나 처음 대자보를 게재한 학생이 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치적 배후’에 대한 의혹도제기되고 있다.

민영화·대선개입 문제 제기에서 사회적 문제로 확대
“거짓된 정보로 선동” vs “젊은이들의 의견 표출”

지난 10일 고대 벽에 붙은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는 고대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서 연일 이슈가 됐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자보는 고대를 넘어 전국 대학가로 확산됐다. 또한 SNS에서도 등장했다. 정치적 이슈에 대해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작한 대자보는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입시 문제’, ‘취업난’, ‘동성애’ 등 사회·문화적 문제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로까지 확산되며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안녕들 하십니까?”

고대 경영학과 08학번 주현우(27)씨는 대자보를 통해 “하루 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자리를 잃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이 대자보는 ‘고대 대자보’로 불리며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 2일 만에 가톨릭대, 광운대,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대 등 10여 개 이상의 대학에서 대자보가 붙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남 일 같지 않다. 나는 안녕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안녕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여 자꾸만 불안하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인지요. 나는 올겨울,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등의 내용이었다.

곧 ‘안녕’ 열풍은 안동대, 제주대, 강원대, 창원대, 경남대, 수원대, 카이스트 등 전국 대학가와 해외로까지 번졌다. 지난 19일 일본 도쿄대학교 정문 게시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적은 대자보가 붙었다. 그는 대자보에 “우리 국민들은 자신의 실명과 의견을 적어 각 장소에 붙이는 것으로 의견을 공유함은 물론 다른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여러분들은 안녕들하십니까?”라고 적었다. 또 칠레의 한 대학교에서는 칠레 대학생이 “한국인 여러분, 한국에서 민영화가 이뤄지지 않도록 싸우시기 바랍니다. 만약 민영화가 이뤄진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사회불평등뿐입니다”라고 쓴 대자보가 붙었다.

또 고대에서는 외국인 유학생이 ‘Hi. How’s it going?’(안녕들하십니까?)으로 시작하는 영문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서로가 정말 안녕한지 물으며 불만을 표출하는 한국 청년들의 글을 읽고 직접 내 손으로 써보게 됐다”고 적었다. 이어 대학교수들도 안녕 열풍에 동참했다. 18일 동양대 인문대 교수는 “얘들아 괜찮다! 안녕하냐고 물어도 된다”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중앙대 교수들도 학교 내 게시판에 “우리 제자들이 안녕하지 못해 우리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대자보를 붙인 바 있다.

입시·취업·육아 등 회 문제로 공감 얻어

대자보 열풍은 SNS를 통해 사회·문화적 문제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확대됐다. 현재 페이스북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는 ‘좋아요’가 26만 건이 넘어섰다.

전남대의 한 학생은 “사회는 우리에게 꿈을 가지라 하고 응원한다고 말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우리는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는 꿈만을 위해 도전해야 한다”며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 만든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천덕꾸러기로 낙인 찍혔다. 이에 대해 묻고 싶다. 왜 당신들이 만들어 낸 문제를 어째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가?”라고 적었다. 자신을 노처녀라고 밝힌 한 사람은 “직업이 취업교육 강사라 진로 상담을 많이 한다.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취업을 걱정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래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라며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성공회대 강모씨는 “나는 성소수자로 안녕하지 못하다.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일상적인, 대학생이 학문이 아닌 취업에 열중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사회다”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이 대자보 사진은 아이돌그룹 멤버가 트위터의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또 성균관대에는 총학생회의 부정선거에 대해 ‘안녕하지 못하다’는 글이 게재됐다.

또 다른 대학생은 “우리는 경쟁과 시장논리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종속돼 인간이 아닌 상품이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가 훌륭한 상품이 될 때 적어도 나만큼은 안녕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라며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사회를 꼬집었다.

이 밖에도 ‘학점에 목숨 거는 현실이 고단해서’, ‘불투명한 미래, 남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도 최저임금이 너무 낮아서’, ‘과제 때문에 밤을 새워도 취업을 못할 것 같아서’,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노후가 걱정돼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글들이 SNS에 올라왔다. 이렇듯 ‘안녕’ 열풍은 대학생들의 정치적 비판에서 전 세대의 사회 문제 비판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잘못된 정보로 선동 “나는 안녕하다”

“저는 당신들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습니다. 종북 세력에게 종북 세력이라고 말하면 일베충으로 매도당하고 인터넷에서 북한과 김정은 정권을 비판하면 국정원 알바라고 합니다. 당신들은 말합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에 안녕치 못합니다.”
지난 15일 경북대에 붙은 반대 대자보의 내용이다. 경영학부 09학번 박모씨라고 밝힌 글쓴이는 철도민영화 우려에 대해 “정부가 끝까지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왜 믿지 못하냐”며 “코레일은 신의 직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임금을 받는데 민영화는 명목일 뿐 뒤에서는 임금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많은 대학생이 대자보에 철도민영화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가운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거짓된 정보로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처음 대자보를 붙였던 고려대 학생 주모군이 노동당(옛 진보신당) 당원으로 알려지자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동이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고대에 붙은 반박 대자보에는 “대자보 운동은 하루 만에 기성 정치단체의 정쟁 도구로 전락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직 국회의원의 내란음모, 한국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논란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분위기다. 이것이 진정한 정의인지 묻고 싶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대자보 현상을 선동으로 보는 이유는 하나다. 철도노조의 파업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대학 내에 붙은 대자보에는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해고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노조원들은 직위 해제를 당했을 뿐 해고는 아니며, 업무에 복귀하는 즉시 복직할 수 있다.

또 철도노조는 파업을 시작하며 민영화 반대와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 강모(27)씨는 “정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그러나 억측만 가지고 다같이 비판하자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34)씨도 “학생들이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면서도 “처음 대자보를 붙인 학생이 정당 당원이라고 하는데 그 정당 측에서 손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구심은 정치권으로도 확대됐다.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이 “대자보를 붙인 주모군이 노동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데 걱정”이라며 “정부가 민영화는 없다고 했지만 철도와 의료 민영화라는 허위 사실이 무차별하게 생산되고 있다. 야권 개입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안녕 열풍에 대해 정당한 의견 표출로 본다. 지난 18일 김희중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은 “청년들이 대자보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로 가는 징검다리”라며 “현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가 청년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대자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또 대자보 내용을 정치적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대학생 나모(25)씨는 “민영화, 노동권 보장 등에 대한 의견은 우리 곁에 있는 사회적 문제일 뿐 정치적 의견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만약 대자보가 대통령 탄핵, 정권 퇴진 등의 정치적 의견을 내세운다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안녕’ 대자보에 대해 진보와 보수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 가운데 ‘안녕’ 열풍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