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묻지마 회장님들’
뚜렷한 직함·직책 없어도 부회장급 호칭
김철·황두연·김원홍… 숨은 진격의 거인들 주목
오너 신뢰… 능력검증 안돼도 지시 따를 수밖에
재계 ‘묻지마 회장님들’의 실체가 특정 기업에서 드러나면서 이들에게 이목이 쏠린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때로는 오너 일가를 앞서는 결정을 했다는 정황들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실체가 드러난 기업들의 공통점이 경영권 위기를 겪고 있거나 그룹 총수의 검찰 수사가 진행된 직후여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기업들의 문단속이 한창이다. 특히 경영승계를 목전에 둔 기업일수록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질까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해당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된다. 나는 그냥 회사 직원일 뿐이다”라고 부인하지만 내부 고위 인사들은 그들을 “직함과 직책은 없어도 최소 부회장급으로 분류된다”고 귀띔한다.
재계엔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있다. 형식상 사장이라는 직함을 쓰기도 하지만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운영에 필요한 명의만 빌려주고 사실상 주인은 따로 있는 경우다. 반면 일반인이 흔히 아는 ‘대표이사’는 주주총회의 결의나 이사회의 선임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두 직함의 차이는 바지사장은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어 경영상의 문제가 발생되면 법적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고, 대표이사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갖고 있어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한 법적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지사장은 ‘사행성 게임’ 같은 음지의 사업장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비전문가란 말 무색
경영에 깊숙이 개입
최근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재계 우수기업에서도 이 같은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쉽게 이해가지 않는 일이지만 검찰의 수사를 받거나 총수가 직접 나서 “(그에게) 경영자문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단순히 경영자문뿐만 아니라 계열사 경영과 인사 및 전략수립 등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까지 드러난 인물만 해도 네 명이다. 이들의 역할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이로 인해 재계 숨은 조력자들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가장 최근 들어난 인물이 동양 사태때 드러난 김철 동양네트웍스 대표다. 그는 39세로 동양그룹 회장인 현재현 회장보다 어리다. 현 회장은 64세다. 업계에서는 김 대표가 최근 동양그룹 사태의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김 대표가 2008년 말 경영일선에 나선 부인 이혜경 부회장의 신임을 얻어 그룹의 구조조정과 인사, 동양시멘트와 동양네트웍스의 법정관리 신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이에 앞서 알려진 인물은 현대그룹의 황두연 ISMG코리아 대표다. 지난해 11월 현대증권 노조가 “황 대표가 현대증권 매각을 추진하는 비선 권력자이고 그룹 전체에 손실을 끼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실제 노조가 공개한 녹취파일에는 자신에게 현대증권 매각과 관련한 권한이 있음을 암시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같은 달 황 대표가 자신의 사무실인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에서 현대그룹 사장단을 불러 모아 회의를 개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그룹의 배후 인물로 지목됐다.
노조는 이날 회의에서 그가 윤경은 대표를 현대증권 사장으로 발탁하도록 경영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노조 파괴를 위한 논의를 벌였다고 주장해 그의 존재가 더욱 부각됐다.
그러나 황 대표는 현대그룹 내 지분이나 직책이 전혀 없다. 그가 대표로 있는 ISMG코리아는 현대그룹 광고를 대행하는 회사로 현대글로벌이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다. 일각에선 황 대표의 부인과 현 회장의 친분이 두텁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황 대표가 현 회장이 힘들 때마다 도와준 게 인연이 됐다는 설만 존재할 뿐이다.
현재 구속된 상태로 검찰과의 막판전쟁을 벌이고 있는 SK그룹도 마찬가지다. 최태원 회장이 공판에 나와 “(그가)주가와 환율, 미 연준 이자율에 정통했고 덕분에 나도 열린 시야로 경영을 할 수 있었다”고 밝힐 정도로 숨은 실세 ‘김원홍 전 고문’의 역할은 상당했다.
실제 최 회장은 한 살 어린 김 전 고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며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주변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그를 윗사람으로 대했으며 한 달에 한 두 번씩 정기적으로 만났다. 최 회장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김 전 고문은 SK그룹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키워 갔다.
최 회장뿐만 아니라 고위 간부들도 김 전 고문의 말에 쩔쩔 맸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가 지시하는 게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일을 실행해야 한다고 해서 ‘묻지마 회장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본지가 [지령 999호-재벌은 무속·역술인에 왜 빠져들까] 제하의 기사에서 보도한 바 있 듯 그의 실체는 증권사에서 일하다 무속인이 된 것으로 알려질 뿐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검찰은 김씨와 최 회장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선 최 회장 형제의 자녀들이 아파 무속인을 찾았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김씨는 경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증권사에 입사했으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한때 금융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 SK해운 고문을 지내며 그룹 총수 일가와 인연을 맺고 최 회장 형제의 선물투자에 조언을 했다는 정도가 김씨에 관해 알려진 전부다.
실제로도 증권가에서는 “김씨가 무속인이라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투자수익률이 너무 높다 보니 김씨에 관해 ‘점쟁이 뺨치는 금융인’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그것이 비약을 거듭해 역술인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검찰도 김씨의 ‘정체’에 관해 “무속인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H그룹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숨은 조력자의 그림자가 드러워지고 있어 이목이 쏠린다. 특히 이 그룹은 재계서열 상위에 올라 있고 숨은 조력자 A씨가 승계구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되면서 그의 행보가 외부에 알려질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양새다.
A씨는 현재 H그룹의 자회사인 연구소 실장이며,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의 대학 선배이자 사모임의 수장으로 알려진다. A씨에게 이 사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부재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 확인이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A씨와 같은 의혹을 받고 있는 동양·현대그룹·SK그룹의 숨은 실세들은 주변의 지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를 보인다. 개인적인 실세는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김철 동양 대표는 ‘책임론’과 ‘그룹 내 실세 주장’을 공식 반박했다. 그는 입장자료를 통해 “동양그룹의 전반적인 구조조정 계획과 실행은 현 회장 및 전략기획본부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룹 내부 실세라는 설은 다른 임원과의 갈등으로 생긴 오해”라고 해명했다. 마찬가지로 김원홍과 황두연 대표도 최근 불거지고 있는 작금의 사태와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김원홍 씨는 향후 있을 재판과 관련해 아직 뚜렷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있고, 황두연 대표 역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에 따라 김원홍과 황두연씨의 경영 참여 개연성은 법정에서 다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대표이사 뒤에 숨어 경영을 한 의혹과 함께 해당 기업의 경영위기 또는 유동성위기를 통한 재무개선의 시급성을 알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표이사와는 별개로 숨은 조력자를 믿고 의지하는 일부 경영진에 대한 경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들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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