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 가는 길, 인생 막장 가는 길

2013-10-14     오두환 기자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마감 10분 전입니다.” 마권 발매 종료가 임박했다는 안내방송이 울리자 마권을 접수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진다. “마권 발매가 종료됐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경마장 내 스크린을 향했다. “달려! 더 더 더 달려!”여기저기서 웅성거림과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1분 30초 만에 경주가 종료되자 “에이, 왜 못 달리냐.” 곳곳에서 탄식과 함께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가족들 여행 장소로 부적합한 경마공원
도박중독위험 노출된 사람 250만명 넘어

한국마사회가 국경일인 개천절과 한글날 경마장 운영에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경마는 여가문화를 위한 스포츠냐 도박이냐에 논란이 뜨겁다. 이런 가운데 한국마사회가 국경일 경마장을 운영해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노숙인 방불케 하는 경마 중독자

지난 9일 취재진은 과천에 위치한 서울경마공원을 찾았다. 경마공원은 휴일인 만큼 많은 관광객과 경마객들로 꽉 들어차 주차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경마를 목적으로 공원을 찾은 사람은 물론 가족이나 연인도 많았다. 가족들 중에는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도시락까지 싸 온 경우도 많았다.
주차장을 지나 경마장 내부로 들어서자 바깥 풍경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40대부터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성보다는 남성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성도 적지 않았다. 한 손에는 경마정보지를, 또 다른 손에는 마권구매표를 쥐고 있는 표정들이 진지하다 못해 비장해 보였다.

경마에 임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맨바닥에 않아 경마정보지를 뚫어져라 훑어보는 사람, 돗자리에 이불까지 가져와 누워 있는 사람 등 마치 노숙인을 방불케 하는 모습들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경마정보지와 경마 결과를 알려주는 스크린뿐이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경마장 내부에 마련된 의자도 제각각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빈자리에 앉을라치면 금세 누군가 달려와 자기 자리니 비키라고 했다.

경마공원은 가족이나 연인들의 여행장소로도 유명한 공간이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근처에는 서울랜드와 서울대공원이 있어 1년 내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하지만 취재진이 경마장을 둘러본 결과 이곳은 가족들이 놀러오기에는 부적합한 장소로 보였다.
경마공원을 찾은 관람객들은 경마장 내부 건물이나 가족공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경마장 내부 건물은 경마에 빠진 중독자들이 가득하다. 마권을 손에 쥐고 “달려 달려”를 외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배울까.

건물 외부에 있는 가족공원은 더 심각하다. 한국마사회에서는 경마장에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족공원 등을 조성했지만 위치를 살펴보면 황당함 그 자체다. 경마장 내부에 있는 가족공원은 말들이 달리는 경기장 안쪽에 조성돼 있다.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지만 돈이 걸린 승부처 한복판에 가족공원을 조성해 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의도가 불순하기 그지없다. 물론 가족공원 안에서도 마권을 구입해 경마를 할 수가 있다.

이날 경마장에서는 경기 결과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천에서 찾아온 한 커플은 “경마에 총 1만6000원을 걸었는데 절반인 8000원 정도 땄다”며 경마 도전 첫경험 소감을 전했다. 경마가 열리는 날이면 늘 경마장을 찾는다는 박모(51)씨는 “25만 원을 땄다”며 좋아했다. 하루 종일 마권을 구입해 경마에 도전해 얻은 수익이란다. 얼마를 투자했냐고 물으니 “수익이 났으면 됐지 그게 뭐 중요하냐”며 웃기만 한다.

경마장에서는 옆사람에게 서로 돈을 주고 받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빌려준 돈을 갚는 경우이거나 수익이 나서 기분좋아 지인에게 주는 경우다.
경마장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경마가 30분마다 1게임씩 시작되니 1시간이 순식간이다. 그만큼 중독성도 강하다. 이곳을 찾은 사람 대부분은 아침에 들어와 저녁에 나간다. 경마에 중독된 사람들은 가방에 음식이나 돗자리 등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많다.

      
“경마로 남은 것은 빚더미뿐”

취재진은 서울경마공원 취재를 마친 다음날 서울 명동역 부근에서 한 경마중독자를 만났다.
한모(60)씨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충무로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직장인이 많아 돈벌이도 괜찮았다. 처음 경마를 시작한 건 10년 전이다. 그는 “처음 친구와 함께 호기심으로 시작한 게 시초가 됐다”고 말했다. 한씨는 “처음에는 경마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재미삼아 말 번호만 찍는 수준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한씨는 금방 경마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결국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경마장을 찾기 시작했고 베팅하는 액수도 점점 커져 갔다. 처음 베팅한 액수는 5000원이었다. “딱 만 원만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20배인 10만 원을 손에 쥐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이때부터 경마에 빠져들었다.
이후 한씨의 베팅액은 5만원, 10만 원, 30만 원, 100만 원으로 커졌다. 급기야 300만 원 을 넘겨 500만 원을 베팅할 때도 있었다. 경마정보지는 물론 경마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분석을 해 가며 베팅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결국 빚더미뿐이었다.

처음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렸지만 결국 사채에까지 손을 댔고 나중에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 운영하고 있던 식당까지 팔아 넘겨야 했다. 한씨는 지금 백수신세다. 그는 “경마중독으로 가진 것을 다 잃었고 아내나 자식들 볼 면목이 없다. 경마를 시작한 것이 후회된다”며 신세 한탄을 했다.

도박중독 유병률 선진국보다 2~3배 높아

도박중독의 피해는 사회적으로 심각하다. 얼마전 하남에서 귀가하던 고3 여고생을 살해한 40대 남성도 경륜 등에 빠져 부채에 시달려 온 신용불량자였다. 이 남성은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평소에도 흉기를 품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 100명 중 1명은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도박 중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 홍일표 국회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5100만 명 중 도박 중독자는 59만 명으로 1.2%에 달했다. 이들 중 입원과 재활치료가 필요한 만성중독자는 6만 명 정도다.

2010년 기준으로 국내 사행산업 총 이용객은 카지노 309만 명, 경마 2181만 명, 경륜 941만 명, 경정 329만 명, 복권 1억8212만 명이다. 경마는 2위다.
또 2009년 발표된 도박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도박중독 유병률이 6.3%로, 전체 250만 명이 도박중독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선진국보다 2∼3배 높은 수치다. 도박 예방과 치료시설이 절실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