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그룹 무너지면…
2000여명 눈물의 시위 “피 같은 돈, 이대로는 못 죽는다”
피해 규모 1조 원·4만7000명에 달해
‘꿀’ 인줄 알았는데 ‘독’ 돼버린 CMA
[일요서울|강휘호 기자] 동양그룹(회장 현재현)의 계열사들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특히 다른 계열사에 비해 자생력이 남아있던 동양시멘트마저 법정관리를 신청해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지키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더불어 동양그룹 기업어음(CP)과 회사채에 투자했던 개인투자자들의 분노 역시 폭발했다. 투자자들 중에는 자신이 평생 모아온 봉급을 투자했거나 교통사고 보상금을 투자했다 날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CP투자 자체가 투자자 본인에게 원칙적인 투자 책임이 있어 구제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금융감독원은 “철저하게 조사하고 조정안을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눈물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구하기만 한 불행들 끝도 없이 속출
알 수 없는 향후 배상, 열쇠는 녹취록
현재 동양과 계열사인 동양 레저, 동양인터내셔널에 되돌아온 만기 CP와 회사채는 1100억 원, 올해 안에 갚아야 할 빚이 모두 1조1000억 원을 웃돈다.
또 금감원에 따르면 동양그룹 채권에 투자한 투자자는 지난달 말 기준 4만9500여 명, 투자금액은 1조5700억 원에 달하는데 피해 규모는 1999년 대우그룹 사태 이후 최대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점 중 한 가지는 종합자산관리계좌(CMA) 1위 기업이었던 동양증권이 “고객들의 CMA 통장 잔액을 노려 CP와 회사채를 팔아먹었다”는 강도 높은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객들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돈으로 회사채권 매입을 꼬드겼다는 게 그 이유다. 특히 불완전 판매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동양 CMA에 가입해 있던 봉급생활자들이었고 동양증권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도대체 왜 봉급생활자들이 주 피해 대상이 됐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앞선 2004년 증권사가 은행과의 장벽 허물기에 나선 때로 되돌아간다. 당시 처음 선보인 CMA는 봉급생활자 사이에서 단숨에 수익성 높은 단기금융상품이면서 이자도 많이 주는 ‘은행통장보다 좋은 통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이른바 ‘CMA 통장의 봉급통장화’를 이뤄냈다. 동양증권 역시 기존 은행의 입출금이 자유로운 요구불예금에 0%에 가까운 낮은 이자를 붙였던 것과 달리 단기간만 예치해도 연 3~4%의 고금리를 얹어주는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한 바 있다.
그러나 동양증권은 이번 사태 속에서 봉급생활자의 CMA도 결국은 금융상품이라는 점을 노렸다. CMA의 본 성격이 투자자가 계좌를 만들어서 돈을 계좌로 입금하면 어음이나 채권에 투자해 그 수익을 고객에게 돌려주는 실적배당 금융상품이라는 점을 이용해 CMA 고객들을 불완전 판매의 수단과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결국 봉급생활자들의 쌈짓돈으로 이윤창출을 하겠다는 말로 개인고객을 유치한 뒤 회사가 기울어지자 자신들이 살기 위해 이들을 이용한 꼴이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금융당국이 이번 사태에 대해 불완전 판매라는 판결을 내린다면 동양 CMA 통장은 2004년부터 진행된 사기극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안타까운 사연들 잇달아
또 다수의 피해를 본 봉급생활자들뿐만 아니라 민원을 접수한 피해자만 1만여 명이 넘어선 만큼 피해자들의 다양하고 기구한 사연들도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3년 전, 큰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고 받은 보상금 3억 원을 이번 일로 잃게 됐다는 한 여성은 “도박에 빠져 처자식을 버리고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의지할 곳이라곤 어린 아이들과 보상금 3억 원이 전부였다. 이제는 그 돈마저 없어지려 한다”며 “동양계열 어떤 회사에 어떻게 들어간다는 설명도 없이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어떻게 생긴 돈인지 아는 직원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나를 무작정 가입하게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세 아이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피해자는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돈이 조금 있었는데 이자라도 더 벌고자 그 돈으로 동양 상품을 계약하고 만기 날을 기다렸다”며 “빚을 내 만기 날짜에 맞춰 가게를 계약했는데 이런 일이 터져버렸다”라고 전했다.
이어 “증권사 직원은 남의일 말하듯 ‘4~5년 기다리면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고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면서 “안전하다는 상품이 왜 이렇게 됐는지, 도대체 우리나라는 이런 기업을 감시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 나와 같이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죽어야 하는 세상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 말고도 암에 걸린 노인을 상대로 수억 원에 가까운 돈을 투자하게 만들었다는 사연 등 CMA에 무지한 이들에게 상품에 대한 설명, 위험의 고지, 동양의 재정상태 설명 등을 하지 않은 채 상품을 판매했다는 사연들이 넘쳐나고 있다. 모두 동양증권의 불완전 판매에 따른 피해를 보았다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9일 오후 2시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 붉은 피켓을 든 2000여 명이 운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작열하는 햇빛에 비친 사람들의 피켓 속에는 모두 ‘동·양·사·기’라는 검은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번 동양그룹 사태에 울부짖는 피해자들이었다. 더불어 과거 부산저축은행 후순위 채권에 투자했다가 저축은행의 영업정지로 피해를 본 피해자들도 이번 동양사태 집단 시위에 가세하면서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투자자들은 이 자리에서 “동양그룹이 5만여 명의 서민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자행했고, 동양의 불법행위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금융당국은 사기행위를 그대로 방치했다”면서 “동양증권의 불완전 판매에 늑장대처를 해 손해를 본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대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현재현 회장, 이혜경 부회장, 정진석 동양증권 사장, 조태준 감사, 김철 동양네트웍스 사장 등 관련자 전원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후 엄벌에 처해 제2의 동양사태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옥주 전국저축은행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도 이날 “금감원이 저축은행 사태를 겪어봤음에도 동양증권이 개인투자자 대상의 부실 회사채와 CP를 판매토록 방치한 것은 직무유기”라면서 “민사로 가도 1~2년 안에 해결되기 어려운 만큼 증권사가 채권발행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거들었다.
정부를 향해 동양그룹 사태 관련 피해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동양그룹 경영진 및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에 대한 처벌 등을 강력히 요구하는 자리였다.
이처럼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에 대한 배상이 가능한지 여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피해자 배상의 구제 범위는 현재까지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민원 중 어떤 민원이 분쟁조정위에 회부되고, 어떤 조정안이 도출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또 분쟁조정위에 회부되고 피해자가 구제되는 데 최대 관건은 ‘동양증권 측이 상품의 위험성 고지 없이 채권을 판매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가’다. 이에 따라 분쟁조정위가 배상내용 등이 담긴 조정안을 내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번 사태의 경우 접수 사례가 많고 피해 규모도 큰 만큼 최종 조정안이 도출되기까지는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배상 대책 있는 것일까
주목할 점은 일부 전문가들이 ‘개인 투자자들은 동양의 남은 자산으로 빚잔치를 하는 것 말고 별다른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투자자 입장에서 불완전 판매를 입증하는 방법이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현행 제도상 불완전 판매의 입증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방법은 현실상 녹취록이 전부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업점에 직접 방문해 가입한 경우를 비롯해 전화상으로도 녹취를 남긴 피해자는 찾기 힘든 것이 현 상황이라 입증의 어려움이 많다. 전화상 녹음이 됐어도 증권사가 녹취를 증거로 완전 판매를 주장하면 오히려 투자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발목을 잡는다. 결국 피해자와 동양증권 중 금감원이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는 녹취록이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외엔 분쟁조정위의 조정안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조정안이 법적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아 효력 발생에는 양 당사자 간 수용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전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만약 조정안을 금융회사가 거부하면 피해자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금감원은 비용 지원 등을 결정할 수 있다.
앞으로 금감원은 분쟁조정위 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수시회의를 별도로 소집해 피해자 구제방안 마련에 주력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한편 동양채권자 비상대책위원회는 ▲금융감독원은 개인피해자 보호를 위해 동양증권 금융상품 소개에서 판매까지 모든 계약과정의 전화녹취, 계약서 및 사실정황을 전수 조사해 위법성 여부를 철저히 무기한 조사하라 ▲금융감독원은 동양증권의 조직적인 사기판매와 업무과실에 있음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피해보상을 책임져라 ▲금융감독원은 동양그룹 개인채권단 협의회 구성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서류를 위조하는 동양증권에 영업정지를 명령하라 등의 요구사항을 내건 상태다.
이경섭 비대위 대표는 금감원에 “지금이라도 개인피해자의 억울한 계약과정을 확인하고 총제적인 부실판매를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사태의 책임이 금감원에도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며 “금감원의 행정지도만 있으면 얼마든지 동양증권에서 공식적으로 피해보상 안내와 사과가 가능한 일이 미뤄지고 있다. 지금도 동양증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경황이 없는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만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양그룹과 관련해선 “현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국민을 상대로 돌려막기를 한 이번 사태에서 채무자의 재정적 파탄의 원인이 기존 경영자의 재산 유용, 은닉 또는 중대한 책임이 있는 부실경영에 기인한다”며 “주식회사 동양의 개인투자금액만도 약 9000억 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상대책위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채권자협의회의 구성원으로 참여시키고 우리 소액채권자들의 모임이 금융기관의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동양그룹의 법정관리 신청에 대해선 “개인 채권자들에겐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라 아직 이렇다 할 준비를 하지 못 했다”며 “법원은 개인채권단협의회의 사단법인 등록 이후로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