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그룹 채권, 불완전판매냐 사기성 발행이냐
2조원 사들인 5만 명 투자자, 구제책 있나
[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내 피 같은 전세금, 자녀 학자금, 노후자금….’ 동양그룹 계열사 채권 2조 원가량을 사들인 5만여 명의 개인투자자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동양증권의 불완전판매에 휘말려 피해를 보았다며 억울함을 호소 중이다. 일부에서는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를 염두에 두고도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해 불법으로 판매했을 개연성에도 주목한다. 한편에서는 채권을 남발한 회사, 고금리에 홀린 투자자들, 팔짱을 끼고 있는 금융당국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지 동양그룹 사태의 후폭풍을 짚어 봤다.
불완전판매만으로는 원금 절반도 못 찾아
법정관리 알고도 채권발행 했는지가 관건
A씨는 보유한 동양증권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자금이 들어올 때마다 증권사로부터 투자안내 문자를 받았다. 이 문자는 ㈜동양을 비롯해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동양시멘트 등의 채권청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란한 수익률 표기는 있어도 투자부적격(투기) 등급이라는 문구는 없었다. 평소에 재테크를 시작해야겠다고 벼르던 A씨는 지점을 찾아가 안전하다는 말만 믿은 채 형광펜에 표시된 몇 군데에 서명을 하고 해당 상품 가입을 마쳤다.
B씨 역시 동양증권 CMA에 돈이 쌓일 때마다 가입 지점에서 좋은 상품이 있다는 투자권유 전화를 받았다. 담당 직원은 동양 계열사 CP를 언급하며 “지금 같은 시기에 이만한 상품이 있겠느냐”면서 “3개월 안에 망할 일은 없다”고 자신했다. 결국 B씨는 투자약정서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로 동양 계열사 CP를 사들였다. 얼마 전의 일이라 아직 서명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B씨의 돈은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해당 상품에 간접투자된 상태다.
CP 간접투자해
현재 A씨와 B씨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인터넷으로 동양 관련 뉴스만 검색 중이다. 만기가 돌아오더라도 동양그룹 계열사의 모든 여신이 동결됐기 때문에 당장 돈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다.
A씨와 B씨가 돈을 받기 위해서는 법원이 회생계획안을 인가하고 회수율이 정해져야 한다. 인가절차는 법정관리 개시 결정일부터 6개월 이내에 하도록 돼 있다. 결국 모든 절차를 마치려면 6~8개월 정도가 예상되며 손실 규모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동양그룹 사태로 인한 투자자들의 성토가 이어지면서 동양증권이 계열사 회사채와 CP를 불완전판매했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불완전판매란 금융회사가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고객이 상품의 구조나 원금 손실 여부 등 주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판매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미 금융감독원에는 개인투자자들의 불완전판매 신고가 수천 건을 넘어서며 폭주한 상태다. 불완전판매 여부는 금융회사 직원과 고객의 대화 내용 등을 근거로 금융분쟁조정위원회와 법원이 판단한다. 그러나 투자자 입장에서 불완전판매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고 증명한 후에도 과실 책임이 인정돼 원금을 절반도 되찾지 못한다.
LIG처럼 구속돼
또 동양그룹의 사기성 CP 발행 의혹도 치솟고 있다. 사기죄는 형법상 목적범이기 때문에 현재현 회장 등 오너 일가가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CP를 발행했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 계열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떠넘겨 자금을 끌어모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앞서 구자원 LIG그룹 회장과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 등 오너 일가는 LIG건설 CP 사기 발행으로 법정구속된 바 있다. 이 LIG CP 사기는 사전에 법정관리 신청 계획을 세운 뒤 이를 은폐한 채 3500억 원대의 CP를 찍어내 투자자들에게 떠넘긴 사건이다. 또 CP 발행 후에는 분식회계로 법정관리 준비 사실을 속였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금융소비자원은 지난 4일 성명을 통해 “동양증권과 동양그룹 사태는 불완전판매 차원을 넘어 사기에 해당한다”면서 “투기등급 어음, 회사채 발행의 적법성 및 불법적 발행, 유통과 판매 행위, 분식회계 의혹 조사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남희 금소원 대표는 “부도 직전까지 서민들의 마지막 생존자금을 빨아들인 행위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범죄행위로 법이 허용하는 최고 수위에서 처벌해야 할 것”이라며 “금융당국과 검찰 등은 빠르고 심도 있는 조사와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부 금융당국자들이 ‘투자자들의 자기책임’이라는 등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금융사고로 본다면 실상을 모르는 행태”라며 “금감원이 불완전판매에 대한 신고접수나 조사로 시간을 끌기보다는 금융소비자 피해구제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인 손해배상 청구, 관련자들의 재산 보전조치, 형사 고발 등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을 보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이대순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는 “동양증권이 계열사로서 고의적 책임이 드러나면 투자자 피해에 100%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다만 불완전판매만으로는 투자액의 절반도 받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증권사 직원도
이에 현 회장에 대한 책임론은 하늘을 찔렀다.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지난 3일 서울 성북동 현 회장의 자택 앞에서 ‘동양그룹 일가는 서민의 피와 땀을 돌려줘라’는 내용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현 회장 등 오너 일가를 상대로 한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계획이다.
현 회장은 같은 날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해 회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고 죄송하고 비통한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며 “동양 임직원들을 움직인 모든 의사결정은 제 판단과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동양증권의 직원들 역시 회사가 내놓은 금융상품을 최선을 다해 파는 소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동양증권은 동양그룹 채권의 주요 판매처이자 불완전판매의 온상으로 지목당하며 급격하게 침체된 분위기다. 한 동양증권 직원은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자책감에 괴로워하다 지난 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주지점 소속인 이 직원이 남긴 유서에는 “동양 회장님, 개인고객들에게 정말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이런 일을 만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복된 한탄이 적혀 있었다.
이어 “회장님을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도 믿었습니다. 제 고객님들께 조금이라도 이자 더 드리면서 관리하고 싶었고 정말 동양그룹을 믿어서 권유한 겁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네요”라며 현 회장을 향한 원망과 고객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묻어났다.
대여금고서 돈 빼낸
부회장 향한 비난 고조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날 서울 강남의 한 지점에 근무하던 다른 직원은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다가 실신한 채 발견됐다. 일부 동양증권 직원들은 현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 앞에서 검은 양복에 흰 마스크 차림으로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의 법정관리를 철회하고 고객과 직원에 사과하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현 회장의 부인이자 고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의 딸인 이혜경 부회장은 동양증권 본사에 있는 자신의 대여금고에서 거액을 빼낸 정황이 발견돼 질타를 받았다. 이 부회장은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도 계좌에서 현금 6억 원을 인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동양 계열사 3곳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다음날인 1일 동양증권 본사를 방문했다. 복수의 관계자들은 이 부회장의 개인 대여금고에서 커다란 가방 4~5개를 채울 만한 현금 다발과 상당량의 금괴가 나왔으며 이 부회장은 이를 모두 찾아갔다고 전했다. 이로써 현 회장 일가는 사재를 털어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자신의 몫을 챙기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검찰고발 당하나
한편 동양증권 노동조합은 현 회장과 정진석 동양증권 사장 등을 사기죄로 검찰에 곧 고발할 계획이다. 동양증권 노조 관계자는 “현재현 회장과 정진석 사장이 동양시멘트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면서 “이혜경 부회장을 고발할지 여부는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동양증권 노조에 따르면 현 회장 일가와 정 사장은 동양증권 임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동양 회사채를 판매해도 좋다고 수차례 독려했다. 이를 믿은 임직원들은 법정관리 신청 2주 전에도 ‘티와이석세스’라는 이름의 회사채 1500억 원가량을 고객들에게 판매했다.
앞서 노조는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해 “현 회장 일가가 추석연휴 전까지 ‘동양은 안전하다. 절대 법정관리는 없을 것’이라며 정 사장에게 ‘계속해서 동양 채권을 시장에 판매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나용수 동양증권 전국지점장협의회장은 “현 회장이 지난 9월 말까지 계열사 CP를 걱정 말고 팔라고 지시했으며 본부장은 이를 직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면서 “동양시멘트 법정관리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현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