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그룹, 시장 믿다가 큰코 다쳤다
지주사 포함 계열사 3곳 법정관리…회생이냐 청산이냐
[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하루하루가 피마릅니다.” 한 동양그룹 임직원의 힘없는 목소리다. 재계에서는 또 하나의 그룹이 무너지는 것이냐며 섣부른 부도 예측이 난무했다. 투자자들은 고금리에 이끌려 사들인 2조 원어치의 동양 채권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냐며 아우성이다.
연내 갚아야 할 1조3000억…손 내밀 곳 없어
매일 수십억씩 만기 도래…돌려막기가 화 불러
채권 2조 사들인 개미 5만여 명 앞날 불안
회사채는 이미 반토막…명암 갈린 증권ㆍ생명
동양그룹이 30일 오전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등 계열사 3곳에 대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동양그룹의 채무는 이날 만기 도래하는 금액만 1100억 원이었으며 연내 갚아야 할 자금은 1조3000억 원에 달했다. 이로써 재계 38위이던 동양그룹은 뼈를 깎는 법정관리를 통해 살아나거나 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됐다.
은행 배제하다
사면초가 처했나
문제는 동양그룹이 은행권 여신보다는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발행에만 집중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만약 그룹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이는 별다른 잡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전줄이 막혀버린 ‘돈맥경화’의 상황에서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금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지면 우선 여신을 쥐고 있는 채권단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때 주채권은행을 중심으로 한 채권단은 기업 회생 시나리오를 가늠한 후 원조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하지만 동양그룹의 경우 CP와 회사채는 2조 원에 이르는 반면 은행권 여신은 6000여억 원에 지나지 않아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찮았다. 그나마 산업은행이 가장 많은 채권을 갖고 있지만 이미 지난달 현재현 회장의 지원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부분의 은행권 채무는 동양인터내셔널과 같이 지원이 시급한 계열사가 아닌 동양시멘트 등 상대적으로 우량 계열사에 몰려 있었다. 게다가 은행권 여신 금액 자체가 적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주채무계열 선정 기준인 금융권 여신 0.1% 이상 기업집단에 포함되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동양그룹은 자금난에 시달릴 때마다 은행권 대신 CP와 회사채를 발행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주채무계열이 아닌 탓에 선제적인 조치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시장에만 의존한 것이다.
이러한 돌려막기는 결국 동양그룹에 화를 불렀다. 위기설이 사그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앞서 발행했던 어음과 회사채의 만기가 한꺼번에 도래하자 낭떠러지에 내몰린 것이다.
기업어음ㆍ회사채
과다 발행해
동양그룹에도 항변은 있다. 꼭 은행권에서 돈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채권을 발행해 얼마든지 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그룹이 주채무계열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2011년이다. 주채무계열 입장에서 간섭받을 바에는 차라리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낫다는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룹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은 동양증권이 담당했다. 실제로 동양그룹이 최근 발행한 회사채 중 3분의 2는 동양증권이 모집을 주선했다. 2010년부터 발행된 그룹 회사채는 연간 5000억 원 수준인데 동양증권은 연평균 67%에 달하는 물량을 소화했다.
몇년간 동양그룹은 최고 11%대의 고금리로 채권을 발행해왔다. 금리가 떨어진 최근에도 동양 계열사들이 제시한 3개월물 CP의 경우 연 7~8%를 제시했을 정도다. 현재 2% 중반대의 시중은행 예금금리와 비교하면 무려 세 배나 높은 수치다.
게다가 이 회사채의 대부분은 개인투자자들이 사들였다. 앞서 종금사 라이선스를 반납한 동양증권이지만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남아있던 개인 고객들의 수는 상당했다. 이들은 저금리 시대에 쉽게 맛볼 수 없는 고금리의 유혹에 흔들려 동양그룹 CP와 회사채를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한번 동양그룹 채권을 사들여 재미를 본 개인투자자들은 재투자를 했고 그 수는 점점 불어났다. 동양 계열사들의 회사채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인 B등급으로 떨어지면서 기관이 외면한 물량에 개미들이 모여든 셈이다. 타 회사채와 달리 동양그룹 회사채가 기관보다 개인들에 인기몰이를 한 이유다.
개미가 흡수한 채권
손실도 결국 개인이
이처럼 고수익률을 자랑하며 동양증권의 판매망을 이용해 팔려 나간 채권들은 그룹 도산 시 개인투자자들에게 그대로 독이 되는 형국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동양이 발행한 CP와 회사채 2조3000억 원 중 개인투자자 4만7000여명이 사들인 물량이 1조5000억 원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됐다.
만약 동양그룹이 완전히 무너지면 이 투자자들의 원금은 사실상 날아가게 된다. 원래 CP나 회사채는 동양증권에 예치한 자산과 달리 예금자보호법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CP의 경우 이론상으로는 만기 전 장외에서 매각할 수 있으며 회사채는 장내에서도 매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양그룹의 계열사 법정관리로 주가마저 폭락한 시점에서 매수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혹여 위험을 감수하는 매수자가 나타난다 해도 가격을 대폭 낮춰야 하기 때문에 손실이 불가피하다.
이미 동양그룹의 위기설이 불거질 때부터 시장에는 징후가 확연했다. 앞서 동양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동양의 회사채 가치가 일찌감치 반토막 이하로 떨어진 것이 증거다. 동양 257회 회사채 가격은 지난 26일 기준 3900원을 기록했다. 거래 단위가 1만 원이고 이달 초 가격이 9600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약 60%가량 감소한 수치다. 동양 258회 회사채 역시 같은 기간 9200원에서 3398원으로 비슷하게 추락했다.
자칫하면 투자자들의 곡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 가운데 동양증권의 불완전판매 논란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미 일부 투자자들은 동양그룹 채권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집단소송을 준비 중이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동양증권이 계열사 CP와 회사채를 무리하게 판 것은 내부통제나 경영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채권에 대해 잘 모르고 투자했다는 가정주부가 많은 점에서 불완전판매 개연성도 다분하다”고 말했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도 긴급 브리핑을 통해 “동양그룹 계열사의 법정관리 사태와 관련해 동양 CP를 사들인 개인투자자들을 위한 불완전판매 신고센터를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자금 통로였던 증권
전면 타격 입어
이미 동양증권은 불완전판매 논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힘겨운 상태다. 국내 최대 CMA 수인 344만 계좌에 잔액 7조 원을 자랑하던 동양증권이 급격히 쪼그라든 것은 지난 23일부터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동양그룹의 위기설이 확산된 23일부터 나흘 동안 빠져나간 자금은 약 4조5000억 원에 달한다.
세부적으로는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첫 영업일인 23일 오리온그룹의 지원 불가 방침이 전해지자 1조 원이 인출됐고 다음 날인 24일에는 2조 원으로 늘어났다. 이후 25일에는 다시 1조 원, 26일에는 5000억 원가량으로 줄었지만 환매는 계속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양증권 내부 관계자는 “심할 때는 을지로 본점 영업부에 자금을 빼내려는 대기고객이 100명 이상 몰리면서 북새통을 이뤘다”며 “특히 주가연계증권(ELS) 등 중도해지 시 자칫하면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품들도 가리지 않고 해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잠깐 진정세로 접어들었던 자금 이탈도 이번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으로 다시 가속화될 것”면서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CP 판매 문제까지 겹쳐 거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계열사 제외된 생명
반사 효과 누려
반면 동양생명은 동양증권처럼 대량 인출 사태를 겪으면서도 슬며시 미소 짓고 있다. 앞서 보고펀드에게 팔리며 계열사에서 제외된 동양생명은 이번 기회에 그룹과 선을 긋고 견실성을 알리려는 모습이다. 동양 계열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동양생명은 바로 계열분리와 사명변경을 검토하겠다고까지 밝혔다.
현재 동양생명의 대주주는 지분의 57.6%를 보유한 보고펀드로 동양그룹 보유 지분은 3%에 지나지 않는다. 공정거래법상 동양그룹의 특수관계자로 분류돼 있지만 지분구조상 그룹과 완전히 분리됐다는 의미다.
동양생명 관계자는 “현재 동양생명은 재무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만약 파산한다 해도 예금자보호법에 의한 보호가 가능하다”면서 “계열분리와 사명변경이라는 극약처방은 보험해약에 따른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한 취지”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이태경 현대증권 연구원은 “동양생명이 그룹의 위기설로 잃은 것은 소액의 2차 마진이고 얻은 것은 홍보효과”라며 “동양그룹 위기설로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 효과가 발생했고 주가에 모멘텀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계열사 매각과
사재 출연 여부는
이제는 추진 중이던 계열사 매각도 불발로 끝나 자금 마련은 더욱 악화일로를 걸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우량계열사인 동양매직 매각은 KTB PE 컨소시엄 내부 사정으로 사실상 어려워졌고 동양파워 지분 매각도 아직 불투명하다. 설상가상으로 그룹에 600억 원을 투자하려던 동양네트웍스마저 법정관리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앞서 현 회장은 그룹 계열사 사장단에 “외부의 시각과는 달리 계열사 중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곳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동양을 비롯한 계열사 법정관리로 현 회장의 말은 덧없는 물거품이 됐다. 게다가 오너가 사재를 털어 출연한다 하더라도 정작 재산 규모가 크지 않아 결정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법정관리를 통해 살아나거나 혹은 청산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됐다”면서 “현실적인 자구책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실행 가능한 규모로 조속히 진행될 것인지가 문제”라고 전망했다.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