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무속·역술인에 왜 빠져들까
인사·대형프로젝트 때 등장 알고 보면 협력 관계?
최태원 회장 재판 계기로 김원홍씨 주목
알게 모르게 중요사안 결정에 영향력 발휘
“대기업 회장이 경영적 판단을 역술인과 논의 한다” “회사 인재를 뽑는 자리에 관상학자가 함께 한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언뜻 보기엔 다소 이상한 조합으로 보이지만, 사실 재벌 및 대기업 CEO와 무속인의 ‘협력관계(?)’는 깊이 뿌리 내려 있다는 게 점집 좀 다녀봤다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그룹 오너들이 인사나 대형 프로젝트, 사옥 이전 등을 결정할 때 역술인이나 무속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전언.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점에 빠질까. 쉽게 결론 내기 어려운, 파급력이 막강한 중요한 순간을 매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역술인은 “그만큼 중압감이 크다는 소리”라며 “의외로 이들이 사기 등에 휘말리는 사례도 많다”고 귀띔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최태원 SK회장이다. 최태원-최재원 형제의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주목하는 인물은 크게 2명이다. 김준홍 베넥스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와 무속인 김원홍씨다. 특히 김원홍씨는 최 회장의 선물투자를 적극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증권사에서 일하다 무속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김씨는 베일 속에 가려진 인물이다. 검찰은 김씨와 최 회장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선 최 회장 형제의 자녀들이 아파 무속인을 찾았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김씨는 경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증권사에 입사했으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한때 금융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 SK해운 고문을 지내며 그룹 총수 일가와 인연을 맺고 최 회장 형제의 선물투자에 조언을 했다는 정도가 김씨에 관해 알려진 전부다.
오히려 검찰이 SK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하며 수사를 본격화한 뒤에야 김씨가 무속인이라는 점이 화제가 됐다.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가 고작 무속인 말을 듣고 수천억 원대 투자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김씨가 무속인이라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투자수익률이 너무 높다 보니 김씨에 관해 ‘점쟁이 뺨치는 금융인’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그것이 비약을 거듭해 역술인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검찰도 김씨의 ‘정체’에 관해 “무속인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오너가 무속인을 만난다고 하면 “중대사를 미신으로 결정하면 어떡하느냐”는 역풍이 불 수 있어 쉬쉬하지만, 바로 윗세대만 해도 그렇게 감출 일이 아니었다는 말도 자주 들린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전 회장 역시 재계의 대표적인 역술 애호가로 꼽힌다. 역술인을 신입사원 면접 때 옆자리에 두고 관상을 보게 했다는 건 세간에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직원을 뽑는 데 재능뿐 아니라 단정한 용모, 겸손한 말씨, 조용한 걸음걸이 등 외모나 태도를 상당히 중시했다고 한다. 삼성 측에선 이 전 회장이 점쟁이와 동석한 채 면접을 했다는 소문은 와전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가 인재를 고르면서 관상에도 비중을 뒀던 건 사실인 듯하다.
특히 임원 승진 인사에선 반드시 관상을 보고 심지어 사주팔자까지 확인했다는 후문도 들렸다. 삼성 관계자는 “풍수지리나 역술을 전적으로 신뢰한 건 아니었다”라고 하면서도 “어느 정도 고려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전했다.
현대그룹에는 2003년 3월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을 벌일 때 역술인이 등장했다.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은 전자와 건설 부문을 정몽헌 회장에게 맡기고, 자동차 부문과 중공업 부문은 각각 정몽구 회장과 정몽준 의원에게 물려줬다. 왕자의 난은 금융 부문에서 벌어졌다. 정몽구 회장이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하자 정몽헌 회장이 인사를 되돌리면서 형인 정몽구 회장을 해임했다.
당시 수세에 몰린 정몽구 회장이 역술인을 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역술에 의지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역술인은 정몽구 회장 측근에게 “7월까지만 버티면 길이 보일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승승장구했던 아버지는 역술인과 거리가 멀었지만 수세에 몰린 맏아들은 역술인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역시 ‘역술 경영’의 대표 주자였다. 사주와 관상을 보고 사원을 뽑았다는 일화는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애초에 사업을 시작한 것도 역술인의 “사업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서향 괴담’ 이목 쏠려
역술가 못지않게 주목받는 직군이 풍수지리가다.
삼성전자는 2005년 용인시가 경기도 기흥(器興)의 명칭을 구흥(驅興)으로 바꾸려 하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삼성은 기흥은 ‘그릇이 흥한다’는 의미를 지닌데 반해 구흥은 ‘당나귀가 흥한다’는 의미라 내심 탐탁지 않아 했다는 후문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또한 영화관(CGV)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활용했다. 재계에는 CJ그룹이 극장 터를 잡을 때 기문둔갑 전문가에게 의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기문둔갑이란 땅의 지세를 살펴서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기술을 말한다. 기업 경영의 측면에서 보자면 도심 안에서 가장 재물의 기운이 높은 건물을 찾아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CJ그룹이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 극장 자리를 잡아놓은 셈이다.
이 때문인지 최근엔 재계에 퍼진 ‘서향 괴담’도 주목된다. ‘서향괴담’은 그룹 본사를 서향 건물에 두는 것을 금기하는 것으로 이를 어기면 ‘화’를 당한다는 풍수학적 견해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서쪽을 향한 건물에 입주하는 것을 기피하는 편인데 ‘지는 해’의 방향이어서 사업성장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서울역 맞은편에 위치한 STX가 재무위기를 겪고 있고, 검찰 수사를 받는 CJ사옥도 서향을 바라본다. 1977년 완공된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은 1999년 외환위기 정국에서 그룹이 공중 분해됐다. 대우빌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옥(현 서울게이트웨이타워·동자동)을 마련했던 벽산그룹은 1998년 재무위기를 맞으며 워크아웃에 돌입한 바 있으며, 갈월동 갑을빌딩을 사용하던 섬유회사 (주)갑을 또한 1990년대 말 유동성 위기를 넘지 못하고 한 시대를 마감했다. 이 외에도 남영동엔 해태의 본사 건물이 있고, 퇴출된 국제그룹 또한 ‘서향 괴담’으로 분류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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