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청계천! 68년 지하생활 끝내고 ‘자연+인간’조화의 상징으로 빛난다

2005-04-09     김재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는 10월 1일 완공을 앞두고 90% 이상 공정률을 보이며 하천의 면모를 갖춰 나가고 있는 것. 수많은 논란 끝에 복원될 청계천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올 것인가.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통해 청계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청계천(淸溪川)은 이름 그대로 서울 토박이들이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한 수질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청계천은 ‘개발’ 논리에 밀려 그 이름과는 달리 ‘죽은 하천’ 의 대명사로 전락해 버렸다.그렇다면 청계천 ‘파괴의 역사’ 는 언제 시작됐을까? 그 연원은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1918년부터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청계천과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살던 남쪽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을 하던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청계천 복개를 결심한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전쟁 상황 속에서 일제는 서울을 병참기지화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신속한 물자 수송을 위해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 도로를 넓힐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일제는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영풍문고가 있는 광통교 인근까지 구간에 걸쳐 청계천을 복개한다.광복이후 1950∼60년대 들어 정부 당국이 심화된 빈민촌 정비에 팔을 걷고 나서면서 본격적인 청계천 개발이 이뤄진다. 1958년부터 복개에 들어간 청계천은 2년 뒤인 60년 10월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한 판자촌 철거로 이어졌고, 이듬해인 61년 12월에는 자동차 도로가 건설됐다. 1958년 5월 25일부터 1961년 12월까지 이미 복개가 끝난 광통교부터 동대문 오간수다리까지의 23.5Km 구간이 복개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12월 들어 7.8Km에 이르는 전 구간 복개를 완료한다.복개 공사를 통해 총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에 이르는 청계천은 광교와 수표교, 오간수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와 함께 지하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청계천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복개된 도로 양쪽으로 상가가 밀집,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새 도로가 필요했다. 이에 아스팔트 도로를 뒤집어 쓴 청계천은 그 위에 또 하나의 고가도로를 덧쓰게 됐다. 이것이 바로 삼일 고가도로다. ‘청계고가도로’로 더 유명한 삼일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첫 준공식을 시작으로, 그 뒤 71년과 76년 길이 연장 공사를 통해 5.8Km 구간에 이르렀다.

그러나 삼일고가도로의 건설로 청계천변의 토지 이용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청계천과 삼일고가도로는 이후에도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1994년 4월에는 400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가는 청계천 복개 구간 내부의 자동차 전용도로 건설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이후 실시된 교량, 구조물 안전진단 실시 결과 위험한 것으로 드러나 1994년 8월에는 29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보수공사가 진행되기도 했다.새롭게 복원되는 청계천은 총 3개의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갈수록 도시적 이미지에서 점진적으로 자연성이 풍부한 하천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고층건물로 가득 찬 서울의 중심 지역인 동아일보 앞 시점부 광장부터 광장시장까지의 제 1구간, ‘동대문 시장통’ 으로 대표되는 상업·유통지역인 광장시장부터 난계로까지의 제 2구간, 난계로에서 신답철교까지 이어지며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강으로 유유히 흐르는 제 3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태평로 동아일보 앞에 위치한 청계천 시점부인 제 1구간은 청계천 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시민들을 위한 휴식처가 꾸며질 계획이다. 특히 한강에서 공급된 유지용수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는 장소로서 복원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청계천 복원추진본부의 정효성 단장은 “청계천을 흐르는 물이 분수를 통해 뿜어져 나올 것이다. 멋진 장소로 꾸며지니 기대해도 좋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청계천의 허리 부분인 제 2구간은 1구간에 비해 자연 하천의 모습을 갖췄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에 바닥의 자재도 자연석을 사용했다. 제 2구간의 가장 특징적인 곳은 ‘오간수문’ 복원 현장이다. 오간수문은 청계천이 서울 성곽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곳으로, 실제로 남아있는 유적은 없지만 사진이나 그림 등을 토대로 하여 새롭게 복원할 계획이다.공사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완벽한 복원이 힘들고, 없어진 서울 성곽과 함께 나중에 추가로 복원이 이루어질 계획이다. 전반적인 다리들의 디자인은 오간수교 복원과 같이 현대적 디자인에 과거의 모습을 덧붙이는 형식이 될 것” 이라고 밝혔다.지난해 7월부터 선착순으로 모집한 2만명의 도자기 그림들이 걸릴 ‘참여와 화합의 벽’ 이 제 2구간을 장식할 예정이다.한강을 향하고 있는 제 3구간은 강폭이 상당히 넓은 것이 특징이다. 공간이 넉넉한 만큼 시민들을 위한 시설도 여기저기 설치될 예정이다.

청계천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도록 한 구조물과 하천을 끼고 있는 공연장,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나올 폭포와 분수들이 선보일 계획이다. 특히, 공사 구간 끝자락에 흉물스런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었는데 청계 고가 도로를 철거하면서 일부러 남겨둔 기둥 세 개였다. 다시 살아난 청계천을 찾는 사람들도 예전엔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로 남겨놓은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공사와 콘크리트 바닥으로 아직은 황량한 분위기의 청계천. 하지만 수 십 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살아있는 하천으로서 활기찬 공기가 감돌 것으로 기대된다.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 책임자 석재덕 소장
“도심 한가운데에서 맑은 하천 시민들께 돌려드리고 싶다”청계천 복원구간의 시발점이자 가장 핵심 지역으로 손꼽히는 제 1구간(광교~광장시장)의 공사 책임자인 (주)대림산업 석재덕 소장(50). 석 소장에게 “2005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해” 라고 밝혔다.그는 “25년동안 여러 공사를 경험했으나 이번 복원공사만큼 사명감을 갖고 일한 적이 없다. 직원 34명이 모두 해외 건설현장에 왔다는 생각으로 휴일도 반납하며 일해왔다” 고 전했다.석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공사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복원공사 구간 중 가장 난코스였기 때문. 하천 폭이 좁고, 주변에 대형 건물이 많으며 교통량까지 많아 최악의 공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타 구간보다 공사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고 한다.공사 기간 중 어려웠던 점을 묻자 석 소장은 “2003년 8월 삼일고가 곡선 부분을 철거할 때 직원들이 48시간동안 꼬박 밤샘하며 해체작업에 매달렸고, 지난해 8월엔 기습폭우로 하천에서 작업하던 굴착장비 5대가 물에 잠겨 5,000여만원의 손실도 입었다” 고 회상했다.그러나 청계천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면서 석 소장을 비롯한 현장 직원들은 그간 고생에 대한 기억을 하나 둘씩 잊고 있다.석 소장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물이 흐르는 걸 상상하면 고생한 건 다 잊혀진다. 끝까지 마무리 잘해서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청계천을 돌려드리고 싶다” 며 “복원이 완공되면 훗날 손자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 이라고 미소지었다.

한양 천도600년 역사가 청계천의 역사청계천은 북쪽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동쪽의 낙산과 남쪽의 낙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서울의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던 개천이었다.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종이 그 후 천도를 하면서 서울의 600년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그로부터 지금까지 청계천은 서울의 역사와 함께해왔다.조선초기부터 홍수만 나면 범람해 온통 물난리를 겪었고, 평시에는 건천으로 오염이 심했던 탓에 당시에도 청계천을 메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태종은 하천을 메우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태종 11년(1411) 당시 최고 규모의 석교인 ‘광교’ 를 세우기도 했다.세종 때에는 수시로 준설을 하고 ‘수표교’ 를 만들었으며, 물 가운데 수표를 세워 물의 깊이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했다. 영조 36년(1760)에는 20만명을 동원해 개천의 폭을 넓히고, 양변에 석축을 쌓고 수로를 직선으로 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