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초대석] 권정달 前 자유총연맹 총재 인터뷰

“내 인생은 숨 가쁘게 흘러온 폭풍의 연속이었다”

2013-05-29     고동석 기자

가려진 5共 전야 10·26 사태-12·12 군사반란 사건 전모 회고록 집필 중 

70~80년대 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전두환 신군부가 창출한 제5공화국의 탄생에 있어 정권의 재단사이자 설계자로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권정달 전 자유총연맹 총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육사 15기로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각각 행정학 석사와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권 전 총재는 군 재임 시절 줄곧 보안부대를 지휘해온 장교였고, 오랫동안 방첩, 보안부대를 지휘하면서 쌓인 군 인맥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12.12 군사반란 이후에는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 언론통폐합과 민정당 창당의 주역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5공 말에 민정당 대선후보로 나선 노태우 전 대통령과 맞서다가 6공화국 집권기에 미국으로 외유 떠나는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15대 국회 때 무소속으로 화려하게 정치일선에 복귀했다가 한나라당에 입당했지만 1998년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서 이한동 전 의원을 지지하다가 좌초돼 탈당,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안동에서 출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낙선한 뒤 2001년부터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를 역임하다가 2009년 퇴임했다.

권정달 전 총재는 보안부대의 요직을 거치면서 전두환 신군부의 태동과 집권기를 목도하고 기획했던 역사의 산증인이다. 권 전 총재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를 통해 “회고록을 집필 중”이라며 “더 늦기 전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역사들을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내 인생은 자의적으로 피해갈 수 없었고 숨 가쁘게 흘러온 폭풍의 연속이었다”며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인터뷰는 지난 23일 이태원동 남산인근 한 호텔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권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이다.

- 회고록을 집필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정리해왔습니까?
▲ 꼭 어느 때라고 할 수 없지만 한 6개월 전부터 더 늙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기억을 되살려 구술로 담아둔 것이다. 기억력이 아직 있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맞추려면 좀 더 자료를 찾아 대조하고 해서 정리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 육사 졸업 이후 5공화국 권력 수뇌부로 참여하기까지 통틀어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까?
▲ 내 군대 생활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폭풍의 연속이라고 할까. 뭐 꼭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5·16 군사혁명, 10·26 사태, 12·12사건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5·16이 일어났을 때에는 내가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우리 부대 대대장들이 혁명하러 가버리고 사라진 일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군도 그렇고 우리나라 전체가 마찬가지였지만 큰 소용돌이 속에서 숨 가쁘게 흘러왔다고 할 수 있다. 12·12 사건은 지금까지도 조마조마했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12·12 사건이 터지던 날 개인적으로 어떻게 당시 상황을 맞닥뜨렸습니까?
▲ 우리는 5·16 군사혁명을 겪었던 세대였다. 12·12 사건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한 군사쿠데타로 기록돼 있다. 정 장군은 불행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와 함께 10·26 사태의 현장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 장군은 김재규와 같이 움직였고, 또 이후에는 계엄사령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는 해야 되는데 조사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임의로 진술서를 요구했지만 정 장군이 받아주지 않았고 검찰도 난감해 했다. 어쨌든 조사는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대하니까 한 번은 조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었지만 계엄사령관이다보니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재가 받는 시간과 연행하는 시간이 엇갈렸다. 당시 소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정 장군을 연행한 것이 최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보다 앞서 이뤄졌다. 이 사건이 결국 훗날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결과적으로 5·18 특별법에 따라 군사반란으로 처벌받았지만 정 장군이 박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최 전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질 않았다. 알고 보니 국방부 장관은 미군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 조사 받는 시간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정 장군은 연행이 됐다. 내게 매우 답답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12·12사건이 5·16 혁명같은 군사혁명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가면 안되는 사건이었고 최 전 대통령을 모시고 정상적인 국정 방향으로 흘러갔어야 했다. 12·12사건 그날 밤 난 5·16 군사혁명 때 기록과 자료를 뒤지면서 매우 불안해 했던 기억이 있다. 

- 그때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아니었다면 12·12 사건으로 빚어진 5공화국의 탄생이나 정치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습니까?
▲ 정승화 장군이 10·26 사건 현장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12·12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정 장군이 계엄사령관을 맡고도 불안하지 않고 당당히 업무를 집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다. 

- 12·12 사건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훗날 5·18 내란목적 살인 등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그런데 총재님은 구속기소 되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에서 였습니까?
▲ 5·18 특별법은 이상하게도 5공화국 시절 국회의원 하고 정권과도 깊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소급입법으로 만든 법이다. 12·12 사건을 군사반란으로 처리했다. 나도 검찰에 불려 다니면서 수없이 조사를 받았다. 내가 하나회 회원이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 장군을 연행하러)갔겠지만 회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 있으면서 하나회 회원들을 도와주는 정도였지 깊이 개입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을 주축으로 하나회 회원들이 결행을 한 정 장군 연행에서 난 제외됐던 것이다. 이런 점이 참작돼 검찰 조사에서 구속 기소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핵심인 육사 하나회 출신이 아니었고 12·12 사건의 주축 그룹에서 빠졌는데도 어떻게 5공 정권 수뇌부로 참여하게 됐습니까?
▲ 부산 보안부대장으로 부마사태를 수습한 뒤에 서울로 올라와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 조직을 가동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정보처를 새로 조직해서 활동을 시작하고 계엄 업무를 수행했다. 내가 보안부대에서 오래도록 근무한 것이 하나회는 아니지만 육사 출신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일종의 기능인으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전부 정보를 다루는 문제부터 정권 창출에 이르기까지 전부 내 손을 거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들은 날 보고 당시 권력을 행사 한다고들 했지만 난 권력을 부린 게 아니라 맡은 일을 했던 것 뿐이었다.    

- 최근 한 종편 방송에서 사채시장 큰 손이었던 장영자 씨가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권 전 총재의 돈줄이었다는 내용이 드라마로 각색돼 방영됐습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 난 장영자를 대면한 일이 단 한번도 없고, 전화통화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지금 완전 사기꾼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장영자는 어음을 갖고 돈 장난을 쳤다.

장영자 밑에서 문제의 어음을 끊어주는 사람이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장영자 사건이 터지니까 공영토건 부도가 도마 위에 올랐고  결국 감사직을 하던 이 사람이 구속되니까 동창이라며 내 이름을 팔고 다녔다. 5공 정권에 몸담고 있다보니 어처구니 없게도 유명세로 피해를 입었다.

이런 일로 세간에 오해가 번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검찰에서 또 조사를 받았지만 장영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5공화국 초기 이뤄진 언론통폐합 사건은 정권 출범 초 기획된 것이었습니까? 이와 관련해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언론통폐합에 대해선 난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 내용을 전혀 모르고 공부하기에 급급했다. 애초 기획안에는 MBC(문화방송)를 없애기로 돼 있었다. KBS(한국방송)을 TV1,2,3으로 하고 신문은 조간 2개 석간 3개, 지방지는 1도 1사, TBC(동양방송)는 없애고 경제지 2개, 스포츠 2개로 결정돼 있었다. 난 바빠 죽겠는데 허문도와 이상재가 하도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달라고 조르는 통에 앞에 나섰다. 정권 핵심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고했는데 대통령이 “야 온 사방에 다 개혁한다고 해놓고 언론까지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며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언론도 개혁은 해야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하면 안된다는 의중이었다.

초기 방안은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들고 나와 조간 3개, 석간 3개, MBC는 살렸다. 일간지 중에는 신아일보만 없어졌다. 언론통폐합의 밑그림은 당시 권력 내부에 언론반이 있었는데 허문도와 이상재가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사들의 로비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 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 수뇌부와 마찰설도 있었습니다.
▲ 당시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과는 마찰이 심했다. 5공 말기에 난 전 전 대통령에게 노 전 대통령을 후계로 세우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이후에는 선거를 도우면서 화해를 했다. 그런데 6공 들어 국회의원 선거에 권익현 대표와 날 공천하지 않고 잘랐다. 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백년정당을 만들겠다고 열정을 쏟아 부었던 내게 노 전 대통령은 앙금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망명아닌 망명이었던 셈이었다. 미국에서 2년동안 지내다가 돌아왔다. 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신당을 창당하려고 했는데 노 전 대통령이 또 가로막았다. 이 일로 국정원 직원들의 미행과 감시까지 받았다. 국정원 간부가 내게 찾아와 “감시하라고 대통령이 시키는 일이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3년에 다시 돌아와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 1998년 한나라당 당무위원으로 활동하던 그해 대선을 앞두고 9월 전격 탈당해 새천년민주당 부총재로 당적을 옮겼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보였는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결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1998년 한나라당은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세론을 앞세워 대선을 치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아들을 군대 보내지 않았던 것 때문에 반대했다. 이 전 총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이 와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안동 조선조 유교문화권 개발 계획을 갖다 달라고 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국회의원을 한번 더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 당적으로 안동에서 출마해서 당선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나라당 당무위원을 던지고 탈당해 민주당에 가보니까 동교동계가 만만치 않았다. 권노갑 씨와도 대화를 많이 했지만 당에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안동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3만표 이상을 받고도 낙선했습니다. 당시 선거에서 낙마하신 패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내가 민주당 후보로 나가도 안동 사람들이 찍어줄 줄 알았다. 안동에선 날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당이 호남당이고 지역감정이 워낙 깊었던 탓인지 찍어주질 않았다. 한나라당으로 나갔으면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당선됐겠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했어도 충분히 이겼을 것이다. 민주당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당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난 고향 안동을 프랑스 리옹처럼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려 했다. 문화적인 유산이 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을 먹고 살게 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협조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희생이 되고 말았다.

-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랜 기간 인내하고 고충을 많이 겪으신 분이다. 아쉬운 점은 국가를 경영한 경험이 있었다면 더 잘 했을텐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온갖 역경을 견뎌내서 이기고 자기 목표를 성취한 것에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분이다. 그러나 너무 진보적인 부분도 있어서 나와 맞지는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5대 국회 때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고집도 세고 자기 철학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좌편향적인 부분도 많았고, 그렇게만 가지 말고 보수적인 측면도 고려하면서 정치하라고 조언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 고집대로 대통령 하고 물러나 있다가 떠나는 것을 보고 많이 안타까웠다. 

-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재임 시에 10·26사태를 조사하고 직접 다룬 과거가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과 정부 출범을 바라보는 감회가 새로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을 잘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국민들이 박 대통령에 대해 안정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경제도 살려야 하고, 계층 간의 갈등, 사회양극화를 해소해야 하는 어려운 일들을 풀어 가야 한다. 하지만 정부 부처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책임을 갖고 일하는 장관이 없고 책임총리제도 말뿐인 것 같다. 경제민주화만 해도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검찰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집행해야 하는 것인데 반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안정감을 주는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점에서 반갑지만 많은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다. 요즘 국정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절로 든다.


- 자유총연맹 총재직에도 오랫동안 재임했는데 2009년 총재직에서 물러날 때 횡령 및 배임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MB 정권 차원에서 이뤄진 검찰의 표적수사였다는 말들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 난 표적 수사였다기보다 기획 수사였다고 추측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가까웠던 사람을 솎아내 날 집어넣었다. 이 정리명단에 포함돼 기획수사가 진행됐다고 본다. 자유총연맹은 땅과 건물밖에 없던 보수단체였다. 이를 살려보려고 진보 정권 집권기에 다투기도 하면서 보수의 가치를 앞세워 겨우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자유총연맹이 자생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매각으로 나온 한전산업개발을 비싸게 샀는데 경영이 잘 풀려서 몇 천억 원의 이익이 났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지인들의 자금을 빌린 것을 돌려주고, 노조에 돈을 빌려준 것, 투자했다가 회수하지 못한 자금 등을 모두 횡령이고 배임으로 몰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검찰이 우리집에 들이닥치고 압수수색했다. 수사의 초점이 기획된 것이어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2심에 가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그런 뒤 대통령이 사면 복권해줘서 마무리 됐다.  

- 지난 대선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안철수 의원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 내가 보기에는 안철수 의원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기대는 쪽은 진보 쪽에 가깝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진보는 보통 결속돼 있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배척당하고 독자노선도 구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총재직 물러나신 이후 안동성소병원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시고, 또 하회탈 보존회도 이끌고 계시는데, 앞으로 남은 인생에 있어 공인이자 사인으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 국가 통합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임계선을 뛰어넘은 기반을 다져놓아야 하고 사회양극화는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 또 안정적인 나라, 외교안보 면에서 튼튼한 나라가 되길 바랄뿐이다. 최근에는 새누리당도 개혁적인 보수를 지향한다고 하는데 보수와 진보 세력이 서로 양극단에서 다가와서 건전한 보수가 되고 합리적인 진보로 사회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가 이 어려운 시기에 주어진 과제들을 슬기롭게 해소하고 반드시 성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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