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 전 문경시장 자서전 28

2013-04-30     신현국

 
3. 새옹지마(塞翁之馬)

- L팀장 : 시장님이 대학 1차 시험에 합격했으면 지금쯤 의사가 돼 있을 텐데 그 때 불합격해 농과를 간 것이 과학원에 들어가는 계기가 돼 오히려 더 잘 된 것 같기도 합니다.
▲ 신 : 제 인생의 새옹지마일까요. 대학입학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참으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재수를 할까도 생각했지요. 그러나 재수하는 게 그냥 싫어 2차로 농과를 지원했습니다. 의사의 꿈을 접는 게 마음이 무거웠지만 왠지 농과를 지원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소를 좋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골에 가서 목장을 운영하면서 낭만적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학을 하고 학교에 나가니 처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농과대학 다닌다고 주변의 모든 분들이 냉소적으로 대했습니다. 고교 동창생들 조차 농과대학 다닌다고 괄시했습니다. 심지어 과대표가 미팅을 주선했는데 미팅 주선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대구에 있는 여자대학에서 아무도 우리과와 미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미팅 한 번 못했습니다.

1학기 마치고 전과를 결심하기도 했지요. 행시(行試) 준비하려고도 생각했지요. 그런데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오르자 그냥 졸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학년부터 가급적 친구들도 안 만났습니다. 외부와 단절하고 그냥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지요. 덕분에 학점을 잘 땄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과학원에 입학했지요. 결국 의과대학 떨어지고 농과대학 간 것이 과학원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환경부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시장 선거에 임하고 보니 농과대학 나온 것과 농촌진흥청에 근무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문경은 농업이 절반을 차지하는데 농업을 모르고는 시정업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지요. 새옹지마입니다.  
제 인생에서 새옹지마는 또 있습니다. 2002년 선거에서 한번 떨어진 것도 제게는 큰 인생 공부였지요. 떨어져 힘들고 아팠지만 그로인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감사함을 알았습니다. 저 혼자 이룰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스스로 오만했던 ‘나’를 되돌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리인지 새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 번 떨어지고 난 뒤 당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제17장 가족 이야기
 
 
1. 어머니
 
- L팀장 : 처음 환경부를 그만 두고 문경시장 선거에 나선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반대하셨지요.
▲ 신 : 그렇지요. 그 좋은 자리 왜 그만두려고 하느냐며 반대가 대단하셨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승낙을 받지 못한 채 환경부를 그만 두고 낙향했는데, 실망이 크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 말씀을 거역한 일이 없었는데, 이번 일은 저의 뜻대로 했었지요.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문경군수하라고 하셨다는 말씀도 드렸지요. 어떻든 선거에 뛰어든 것은 끝내 어머니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어요. 어머니에게 하나 뿐인 아들은 전부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알파(α)와 오메가(Ω)였지요. 그런 어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해 마음이 무척 무거웠어요.
 
- L팀장 : 어머니께서 통장을 전해 주셨다면서요.
▲ 신 : 2002년 선거를 앞두고 고향인 가은의 5일 장에 갔었는데 장터에서 어머니를 만났지요. 인사를 드렸더니 “애미(아내) 가은집에 한번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날 집사람에게 어머니의 뜻을 전달했지요. 집사람이 어머니께 갔더니 어머니께서 당신이 아버지 돌아가신 후부터 관리해 오던 어머니 통장을 주시면서 “나는 이게 전부다. 얼마 안 되지만 이것이라도 보태라”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찡했지요. 감사했습니다. 금액은 1700만 원 이었어요. 그 돈 안 쓰려고 했는데, 나중에 썼습니다. 쓰면서 선거 끝나고 갚아드리려고 했는데 결국 못 갚았습니다. 불효를 했지요. 갚는다 갚는다 하면서 선거 4번 연속으로 치르고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을 2번이나 겪다 보니 아직까지 부도를 냈습니다. 게다가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끝나고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고향의 땅을 2필지나 팔았습니다. 선거 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나중에 아시게 되면 많이 서운하시겠지요. 그 땅은 어머니에게는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큰 불효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하게 제 곁에 계시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아내
 
- L팀장 : 시장 득표의 절반 이상이 사모님 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신 : 35년 동반자입니다. 환경부에 있을 때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 꾸려오면서 고생 고생했지요. 선거라는 것이 당사자야 자기 좋아서 출마하는 것이지만 가족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지요. 23년 서울 생활하면서 겨우 아파트 하나 장만하고 이제 살만하니까 선거에 나가겠다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공천을 보장받은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기반이 튼튼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냥 그만 두겠다 하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혼이라도 하자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아내는 처음에 조금 반대했지만 저의 뜻이 확고한 것을 확인 하고는 이내 동반자로 저를 격려해 주었지요. 
그리고 선거 4번,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2번을 치루는 동안 돈 문제는 아내가 책임지고 꾸려 나왔습니다. 급전이 필요할 때 아내 친구, 처갓집 식구들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아내가 살림 꾸려 나가는 것이 신통할 정도입니다. 
 
2010년 경찰청, 검찰조사를 받을 때, 아내도 근 50시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지요. 어지간한 사람들은 조사받는 자체도 감당하기 어려울텐데,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장 재선에 성공하여 겨우 숨을 쉴 만할 때 또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이번만은 정말 안돼요. 공천도 어렵잖아요. 그냥 있으면 시장 3선은 보장되어 있는데… 대법원 재판도 아직 종결되지 않았는데….” 
결국 이번에도 아내는 저의 생각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는 또 양보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아내의 말이 옳았습니다. 아내의 말대로 출마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검찰·경찰조사 받으면서 서울의 마지막 남은 아파트마저 팔았고, 이번 국회의원 선거 끝나고는 점촌의 집마저 전세를 놓고 가은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내의 속은 아마 새까맣게 다 타있을 것 같아요.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아 늘 져주고 양보하지만 그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어떻든 국회의원 선거 끝나고 고향 집에서 제 인생 처음으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은 동반자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3. 쌍둥이 딸들
 
- L팀장 : 2010년 선거에서 큰 딸이 큰 역할을 했지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민들을 많이 울렸습니다.
▲ 신 : 그렇습니다. 사실 그 때는 선거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습니다. 가택압수수색, 영장청구, 연일 이어지는 경찰, 검찰조사 때문에 선거를 치를 형편이 아니었지요. 2010년 5월 중순 후보등록을 마치고 선거를 하려고 사무실에 참모들이 모였습니다. 홍보물을 급히 만들고, 유세차량 제작을 의뢰 했지요. 그런데 연설원이 준비가 안 됐습니다. 미리 섭외를 했어야 했는데 그럴 정황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누구를 연설원으로 세울까 고민했지만 해답이 없었어요. 그때 큰 딸이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큰 딸에게 방법이 없구나. 네가 연설원으로 한 번 해보라고 부탁을 했지요. 효과는 좋았습니다. 땜빵으로 선임한 큰 딸이 마이크를 잡고 나긋나긋하게 호소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저는 큰 딸입니다.”
“우리 아버지 그동안 문경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실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일밖에 모르는 분입니다. 정말 맡은 일 열심히 하십니다.”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먹였지요. 큰 딸 때문에 2010년 지방선거에서 시민들이 저의 유세장에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저의 유세차가 있는 곳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지요. 대단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무소속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문경시의원 9명 중 5명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무소속 바람을 일으켰지요. 그 때 유행한 이야기가 있지요.

<다음호에 계속>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