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피플|통혁당 무기수 오병철 관장

“가장 힘든 것이 사람 징역”

2013-04-15     최은서 기자

 “교도소는 또 하나의 작은 사회…인성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
 “사람과 사회·역사·환경이 ‘따로 또 같이’ 회복될 때 인간 힐링 완성”

민족에 대한 고민을 해오던 서른 살 청년은 통혁당(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기약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무기수로 복역했던 오병철(77)씨는 20년이 흐른 50대가 되어서야 바깥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0년이면 금수강산도 변한다지만 20년 감옥생활 끝에 마주한 세상은 그에게는 ‘천지개벽’과도 다름없었다. 수십 년의 감옥 생활을 꿋꿋이 버텨나갈 수 있게 해준 서예와 검도, 기공은 그가 낯설기만 한 사회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현재 오 관장은 마음을 잘 다스린다는 뜻의 ‘제심관’이라는 대한 검도회 산하 검도장의 관장을 맡고 있다.

오병철 관장은 1968년부터 무기징역으로 20년의 옥고를 겪었다. 대학생 시절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학사주점을 열었다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됐다. 1968년 8월 중앙정보부가 학사주점을 북한 공작금으로 만들어진 통혁당 거점조직으로 지목하면서 그의 기나긴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고된 감옥살이

자유롭게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즐겼던 그는 창살 속에 갇히게 되자 숨이 턱턱 막혀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 갇히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불안이 엄습해오고 가슴이 두근거려 숨이 자꾸만 짧아졌다. 하루 24시간이 너무 길고 답답하기만 했다. 눈이 어두워지고 먹어도 소화가 안됐다. 어떤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일주일 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새기도 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며 20년의 감옥생활 속에서 인성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 관장은 “교도소도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하루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노출되고 함께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제소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정말 인간이 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교도소 생활에 대해 담담히 털어놨다.

교도소의 하루하루는 ‘적응을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여름에는 사람마다 뿜어내는 열기로 마치 감옥은 ‘한증막’과 같았다. 겨울에는 찬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를 막아주는 것은 가마니뿐이었다. 고된 추위로 겨울마다 시달리는 신경통도 그의 감옥생활을 지치게 하곤 했다.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냐는 물음에 그는 “배고픈 징역도 살 수 있고 추운 징역도 살 수 있지만 가장 힘든 것이 사람 징역이란 말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다른 감옥, 다른 감방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운 사람과도 꼼짝없이 24시간 얼굴을 마주대하고 살아야 한다. 서로 얼굴을 피하고 미워하는 등 서로 심리적으로 용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이 피폐해진다”고 말했다.

마음 다스리기

교도소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음 다스리기’가 필요했다. 그에게는 검도와 서예, 기공이 ‘마음 다스리기’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검도 실력은 교도소 안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대학시절 전국체전 우승자로 이름을 날린 검도선수였다.

교도소 안에서는 검도를 할 기회가 딱 한번 주어졌었다. 대전교도소에 이감됐을 때 교도관이 교도관 검도대회를 앞두고 그에게 지도를 부탁했던 것. 한 달 남짓 교도관과 같이 한 검도가 감옥 시절 유일하게 검도를 했던 시간이었다. 그의 지도를 받은 교도관이 우승을 해 교도관이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었다고.
검도 실력만큼 그의 유려한 붓글씨도 입소문을 탔다.

교도관들이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왔을 정도. 그는 “가장 많이 써준 글이 애인(愛人)이었다. 교도관들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요즘은 좋아하는 글귀는 ‘서로 하늘’이라는 말을 애용한다. 특히 결혼식에서 이 말을 많이 쓰곤 한다. 서로가 서로를 하늘처럼 여기라는 뜻에서다. 요즈음 와 닿는 글은 ‘인내천(人乃天)’이다.”

그가 붓글씨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전주교도소에서 서예반이 우량수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량수들만이 신문을 볼 수 있었다. 외부소식에 목말라 있던 그는 뉴스를 통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우량수들이 있는 서예반에 들어가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한 것. 20년 동안 사회 흐름은 변화돼 갔다. 그는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희망이 샘솟았다. 그 전에는 감옥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으로 학생들이 붙잡혀 오면서 학생들을 통해 책을 볼 수 있었다. 책을 보고선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놀랍기도 했고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20년만에 출감했고, 그와 함께 동거동락했던 제소자들은 ‘교도소가 텅 빈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검도는 거울

20년 만에 다시 만난 바깥세상은 낯설기만 했다. 오 관장이 청년 시절 자주 오가던 연세대 앞길과 신촌, 종로는 옛 자취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천지개벽한 것 같은 세상보다도 들쑥날쑥한 심리상태가 그를 더욱 당혹하게 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마음을 충분히 다스렸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나오고 보니 다시 원점이었다.

나도 모르는 ‘울화’가 갑자기 치밀어 오르고 술 한잔만 마시면 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뜨겁게 쏟아졌다. 끝도 없이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기도 했고, 우울과 격정이 몰려왔다”고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그의 심경을 말했다.

이 때 그를 치유해준 것이 ‘검도’와 ‘기공’이었다. 그는 “나 자신을 치유해주는 기재가 검도였다. 검도를 하며 치고 때리고 소리 지르면서 그날 그날 쌓였던 울화를 풀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검도는 마치 ‘거울’과 같다. 다른 사람과 겨누면서 내 마음이 성급한지,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지, 요사스러운지 상대방에게 나의 모습이 비친다”고 검도를 꾸준히 하지 못했다면 현재의 건강은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기공은 굉장히 정적이다. 검도를 하고 나면 고조된 상태다. 반면 기공은 나의 원형이 있다면 그 원형으로 돌아가서 회복이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많다. 오 관장은 “눌리거나 찌그러지고 상처 난 것을 아물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이 사회에서 소외됐던 생명들을 북돋아주고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며 “역사적으로 통일이 되고 평화가 찾아와야 온전한 ‘힐링’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다. 사회를 함께 이루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기 완성이 된다. 사람과 사회·역사·환경이 ‘따로 또 같이’ 회복될 때 인간 힐링이 완성된다고 본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