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대통령과 국민’중간다리
2005-04-09 유제성<언론인>
당시 노 대통령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이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며 속에 있는 생각들을 많이 이야기 했다.기자들은 올해도 같은 코스를 오르는 노 대통령이 산상 대화에서 많은 속내를 털어놓을 것으로 잔뜩 기대했고, 노 대통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올 봄에는 꽃이 늦게 피는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2시간 30분 가량의 산행에서 끊임 없이 기자들과 대화를 주고 받았다. 중간중간 쉼터와 산 정상에서는 ‘간이 기자간담회’까지 열렸다.이를 통해 노 대통령은 민감한 사안, 특히 최대 현안이 돼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해 깊은 말들을 많이 했다. 때문에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파장이 예상되는 발언에 대해선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산중 발언 가운데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그렇다고 기자들이 대통령의 말을 기사로 다 쓰지 못했다고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다양한 현안을 놓고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국정 방향의 배경 설명을 듣게 된 데 대부분 만족했다. 60여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등록된 기자는 300명이 넘지만 산행에 초청된 대상은 돌아가며 대통령의 일정을 취재하는 ‘풀 기자단’으로 제한됐다)과 함께 어울린 이번 산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급적 기자들과 스킨십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노무현 대통령, 일요일 발표 많아 출입기자들 노이로제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을 훨씬 앞두고 아직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지도 않은 경선 후보 시절, 청와대에 출입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취재하던 기자 7~8명과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서울 인사동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경선후보는 청와대 출입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두고 봐라. 내가 청와대에 입성한다. 그러면 청와대 브리핑 시스템을 싹 뜯어 고치겠다. 공보실에만 맡기지 않고 미국 대통령처럼 주요 현안마다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직접 설명하겠다. 아울러 기자단도 없애고 백악관처럼 브리핑룸을 운영해 모든 언론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그 때 노 후보의 말을 들은 기자들은 속으로 냉소를 띠었다. 당시 그는 이인제·한화갑 후보에게 밀려 민주당 대선후보조차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고, 만에 하나 대통령이 되더라도 대통령이 기자들을 직접 상대하기는 우리의 정치·언론문화에선 실천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실제로 대통령이 돼 버렸고, 언론과의 접촉도 대폭 확대했다.
청와대 기자실을 개방했는가 하면, 일요일이면 불과 몇 시간 전에 통보만 한 채 춘추관에 들르곤 해 기자들이 ‘일요일 노이로제’에 걸리게 한다. 조금 큰 현안이 발생하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연다.물론 “기자들과 소주파티하며, 기사 로비하지 말라”고 공무원들에게 엄명을 내리고, “국민의 정부를 봐라. 기자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해도 물어뜯기는 마찬가지 아니더냐”고 참모들에게 말한 일이 대변하는 ‘언론과의 긴장 관계’는 별개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 이전의 두 민간인 출신 대통령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달랐다. YS와 DJ는 일선 정치인 시절 언론 플레이에 매우 능했지만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는 ‘기자 관리’를 참모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춘추관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YS,‘YS장학생’ 얘기 나돌 만큼 기자관리에 각별히 신경
YS는 정계에서 활동할 때 ‘YS 장학생’으로 불리던 일련의 정치부 기자들을 ‘관리’하면서 정치적 고비 때 마다 활용했다. 지금도 정치권에선 YS 장학생 기자들의 활약상이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박철언 전 의원과의 파워게임에서 보여 준 단결력이다.1990년대초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통합 직후 노태우 대통령의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YS와 박철언 의원은 팽팽한 힘 겨루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3당 통합의 조건으로 내각제 개헌을 밀약했다는 ‘내각제 각서 파동’이 발생했다. 초기엔 YS가 크게 밀렸다. 내각제 약속을 파기하려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자 YS는 당무를 거부한 채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때부터 각 언론사에 퍼져 있던 YS 장학생들이 나섰다.
이들은 여론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결국 국민들의 관심을 ‘약속 파기’가 아닌 ‘각서 유출’로 돌려놓아 비난의 화살이 박철언 의원을 비롯한 민정계로 쏠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장학생들은 ‘YS 대통령 만들기’에 노골적으로 나섰다. 선거가 한창일 때 해외특파원으로 나가 있던 한 장학생 출신 기자가 ‘승리를 애타게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아 선거 캠프로 보낸 편지가 기자실에서 공개되는 바람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후 1993년 YS가 청와대에 입성할 때 YS 장학생들도 대거 춘추관으로 들어갔다. YS 임기 초기 국정운영 지지도가 무려 90%선까지 치솟은 것은 모처럼 탄생한 문민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컸지만 청와대 출입기자가 된 ‘장학생’들의 노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당시 언론비평 매체들은 청와대발 기사가 YS 찬양 일색으로 흐르자 “청와대에는 YS만 있고 언론은 없다”는 비판기사를 싣기도 했다.
DJ, 동교동 출입기자 대통령 당선 후 대거 입성
DJ의 경우도 언론의 속성을 간파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정치인 시절부터 탁월했다. 그가 사형선고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은 끝에 권좌에 오르기까지는 그의 정치적 신념에 뜻을 같이 하거나, 혹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끝까지 뒤를 밀어 준 특정 기자 집단의 덕이 컸다.‘YS 장학생’과 구별돼 그냥 ‘DJ계 기자’, 또는 ‘동교동계 기자’라고 불리곤 했던 이들도 1998년 국민의 정부 탄생과 함께 대부분 출입처를 청와대로 옮겼다.언론사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청와대 출입은 보통 경력 15~17년 이상의 차장급 중견기자가 맡는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 몇몇 언론사에선 경력이 일천한 젊은 기자들이 청와대를 출입했는데 거기엔 웃지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자 각 언론사에선 DJ계 기자를 속속 청와대에 보냈지만 일부 언론사는 DJ계라고 할 만한 기자가 없었다.
그러자 다음 순위로 ‘호남 출신’을 찾았는데 어떤 언론사에선 그 때까지 호남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어 중견 기자로 성장한 호남 사람이 없었다. 고심 끝에 그 언론사는 그래도 가장 경력이 많은 호남 출신 기자를 청와대로 보냈는데, 발탁된 기자는 겨우 입사 5년차였다고 한다.DJ는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 정치부 기자 출신들을 대거 비서실에 채용했다. 그 가운데 K신문의 K기자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춘추관에 드나들다가 어느날 갑자기 출근지가 비서동의 정무수석실 비서관실로 바뀐 경우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정·관계로 진출한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K기자처럼 조금의 시차도 없이 하루아침에 같은 부처안에서 기자가 취재원으로 신분이 바뀐 일은 드물다.DJ 시절 청와대를 출입하던 기자들은 국민의 정부 임기 후에도 ‘청춘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세배도 간다는 내용은 지난호에 소개한 바 있다.이처럼 ‘양 김씨’는 일선 정치인 시절 기자들을 좋아(?)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선 기자들이 대통령 얼굴보기 조차 어려워졌다. 청와대 출입기자라고 하면 대통령과 자주 대면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특히 현정부 출범 전까지는 더욱 그랬다.대통령의 공개된 일정 취재는 출입기자 전원이 하는 것이 아니라 2~3명의 ‘풀 기자’가 대표로 해서 취재 내용을 기자실에 풀어놓게 된다. 따라서 순환되는 풀 차례가 왔을 때와 1년에 한 번 있는 연두기자회견이나 창간기념회견 정도에서만 대통령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딱딱한 공개 행사 자리니 만큼 대통령의 ‘속내’를 들을 경우는 전혀 없다.참여정부들어서야 대통령과 사담(私談) 수준까지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곤 하지만 지금은 또 지금대로 창간기념회견이 없어지고 기자들의 본관 취재가 원천봉쇄되는 등 애로점이 있다.그렇다면 군 출신 대통령들과 기자들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이승만 대통령과 윤보선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경무대) 기자들에 얽힌 이야기는 잘 들을 수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는 ‘대통령과 기자’를 둘러싼 숱한 일화가 있다.
먼저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공식적으로 만나 일문일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연두 기자회견이 처음 생긴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대통령이 ‘연두교서’라는 것을 발표해 한 해 동안 국정운영의 지침을 내리는 게 전부였다.그렇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은 ‘짜고 치는’ 것이었다. 청와대에서 미리 질문 내용을 기자실에 내려 보내 각 기자들에게 배당했는데 주로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평가해 달라’ ‘북괴의 위협에 대비한 안보 태세 강화 방안은 무엇인가’ 등 홍보성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이었다.물론, 지금도 사전 시나리오가 전혀 없는 연두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TV로 생중계되는 만큼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질문 순서를 정하고, 질문 내용이 중복되지 않도록 기자실 자체내에서 조정하며, 이를 비서실에 통보해 미리 충실한 답변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 인간미 물씬,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아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한 미국식 연두 기자회견은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국회 국정연설로 대체됐다.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 야당’인 민한당·국민당 의원들을 의사당에 앉혀 놓고 일장 ‘훈시’를 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후 정국 상황이 변하면서 1985년부터 연두 기자회견으로 환원됐는데, 당시엔 언론기본법에 따라 언론사가 통·폐합돼 있는 상태여서 청와대 출입기자(카메라 기자를 제외한 취재기자)가 불과 10명 남짓했다. 수백명의 기자가 북적이는 지금의 연두 기자회견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때는 언론 상황이 극도로 열악한 시절이었지만 간혹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다음은 한 언론인이 소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기자 사이에 발생한 일화.“1970년대에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호탕한 성격의 박정희 대통령은 간혹 출입기자들을 불러 술자리를 갖곤 했다. 1979년 10·26이 나기 얼마 전으로 기억하는 데 , 어느날 관저에서 대통령과 영부인 역할을 하던 장녀 박근혜씨가 출입기자 6, 7명과 함께 한 잔 하고 있었다. 맥주와 막걸리를 섞은 ‘폭탄주’였는데, 서로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화제가 당시 야당 총수이던 YS에게로 옮겨 갔다. 당시 YS는 유정회 출신 박두진 의원의 국회의장 선출에 반대하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가 오가다가 화가 난 대통령이 갑자기 “D일보가 YS를 돕는 것 아니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D일보 K기자를 향해 박치기를 한방 먹인 뒤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K기자는 그 몇 달 전 연두 기자회견에서 배당 받은 질문 내용을 삐딱하게 물어 대통령의 표정을 한순간 일그러지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