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은밀한 경영수업…떨고 있는 중견업체들

재계 3·4세 경영 본격 시동

2013-01-22     이범희 기자

미래 산업에 집중 의지…황태자들의 뚝심투자 결과 주목
구광모·구본웅·김동관·정영이·이강후·박주형 등 이목 쏠림 심해

중견업체 “오너 일가와 싸우는 것 보다 그냥 포기가 낫다”
여성 황태자들의 경영수업 참여 늘어…장자승계 원칙 깨질까


[일요서울ㅣ이범희 기자] 재계 황태자들의 돌풍이 예상되고 있는 만큼 중견업체들의 불안 심리도 커지고 있다. 대규모 자본을 내세운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오너家와의 경쟁마저 예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황태자들의 복귀소식은 중견업체들에겐 상당히 민감하다. 향후 그들의 행보가 중견업체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LG그룹 구광모 차장의 국내복귀 소식이 알려졌다. LS그룹 구자홍 회장의 외아들 구본웅 대표도 벤처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관 실장도 태양광 업계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이외에도 경험을 쌓기 위해 해당 기업에 출근하고 있는 황태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 재벌가의 경영승계는 재산을 넘겨주거나, 해외 유학을 통한 내부 입지 강화정도였다면, 이제는 현장경영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 중이다. 이 때문에 이들 재계황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중견업체 대표들의 눈길을 잡고 있다.

구본무 LG회장의 양자인 구광모 LG전자 차장이 미국법인에서 근무하다 국내로 복귀했다. 지난 13일 LG와 업계에 따르면 구 차장은 2009년 12월부터 LG전자 뉴저지법인에서 금융·세무 등 재경업무를 담당하다 올 초 LG전자 HE사업본부 상품기획팀으로 복귀했다. HE사업본부는 TV 등을 담당하는 LG전자 내 핵심부서다.

구 차장은 구본무 회장의 동생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이지만 구본무 회장이 그를 2004년 양자로 입적시킨 이후 LG그룹을 이끌 황태자로 꼽혔다.

LG는 장자승계원칙을 준수하고, 과거 경영권 승계과정에서도 무리 없이 장자승계 원칙이 준수돼 왔기 때문에 구 차장의 LG경영 승계와 관련된 잡음은 없다는 게 내부의 평가다. 그는 현재 (주)LG의 지분 4.72%를 보유해 구본무 회장,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구본능 회장에 이어 4대 주주이기도 하다.

구 차장은 2005년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을 마치고 미국 로체스터인스티튜드공대를 졸업한 뒤 2006년 LG전자 재경부문 금융팀 대리로 입사했다.

2007년에는 유학길에 올라 스탠퍼드대 MBA를 취득했으며 이후 2009년 11월 초 LG전자 재경부문 금융팀 과장으로 복직했다. 2009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2011년 초 차장으로 승진했다.

아직 미비만 실적이지만 고군분투하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기획실장도 중견업체의 견제를 받는 황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태양광 업종 불황에도 여전히 태양광 사업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일에 몰두하고 있다.

게다가 모기업 한화가 추진하는 글로벌 사업의 중심에는 태양광이 있다. 한화는 2010년 솔라펀파워홀딩스를 인수하며 태양광 시장에 진출한 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유럽 최대 태양전지 모듈업체인 독일의 큐셀을 인수해 세계 3위 태양광 기업으로 도약하기도 했다. 
 


김 실장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2010년 출범 이후 한화솔라원의 적자 폭도 개선되고 있다. 여수에 건설 중인 폴리실리콘 공장이 완공되면 폴리실리콘-잉곳-웨이퍼-태양전지-모듈-태양광발전의 수직계열화를 통한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치킨게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LS그룹 구자홍 회장의 외아들인 그룹 3세 구본웅 포메이션8 대표 또한 동종업계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번에 받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 인근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벤처캐피탈을 창업한 그의 영향력이 아버지의 회사인 LS그룹의 2차 전지 사업, 스마트그리드 사업 강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평이 늘어나면서 이를 시기하는 업체들의 눈총이 늘고 있다.

LS그룹은 포메이션8의 1호 펀드에 500억 원을 ‘몰빵’ 투자해 포메이션8을 통해 해외 투자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같은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포메이션 8의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포메이션 8은 미국 프로스포츠 최초의 한국인 구단주이자 유튜브, 페이스북, 야후, 구글 등에서 재무담당자를 지낸 유기돈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미식축구단) 대표 등을 비롯해 구 대표와 지인들 8명이 함께 차린 회사인데다 세계 최고 수준의 환경분야 벤처캐피탈 창업자인 톰 바루크 등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 중에도 NHN, 세아그룹 등이 포메이션8에 투자한 바 있다.

조용한 황태자들, 경영수업은 ‘철두철미’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황태자들의 경영수업 소식도 중견업체의 견제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둘째딸인 정영이(28)씨가 최근 경영수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대그룹 경영권 승계와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와튼 스쿨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 정씨는 지난해 6월께부터 현대유엔아이 재무팀에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언니와 함께 동생도 현대유엔아이에서 일하고 있는 사실에 관심이 모인다.

현대유엔아이는 SI업체로 현정은 회장(68.18%), 정지이 전무(9.09%) 등 총수 일가가 최대주주이고, 상장예정인 현대로지스틱스의 최대주주(24.36%)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대로지스틱스가 계획대로 올해 상장한다면 현 회장 등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은 훨씬 강화되고 상장 차익을 누릴 수 있다.

이와 동시에 현대로지스틱스가 향후 현재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5.05%)도 늘려간다면, 현대유엔아이를 정점으로 현대로지스틱스→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 등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출 수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자녀도 경영수업에 돌입했다. 이 회장의 장녀인 이경후 씨가 최근 CJ에듀케이션즈에 대리로 입사하자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형제들을 배제하고 경영승계 준비에 착수했다는 분석이다.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의 차녀 박주형씨의 경영 참여설도 불거졌다. 박 씨가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에만 총 5차례에 걸쳐 금호석화 지분 1만6500주를 사들이면서 이 같은 경영참여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분 매입 대금도 모두 자기자금으로, 한 달 평균 매입 대금은 20억 원 안팎에 달한다.

첫 지분 매입 시점이 채권단 자율협약 졸업 승인일(지난해 12월 13일) 직후인 만큼, 향후 사업 성공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금호석화의 홀로서기에 오너 3세인 박 씨가 힘을 보탠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그동안 금호家에서 선대로부터 내려온 공동경영합의를 통해 ‘남자에게만 상속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박 씨의 행보에 이목이 쏠린다. 일각에선 금호석화의 후계구도의 변화가 회사의 독립경영에 큰 탄력을 부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오너가 여성의 지분 보유를 허용하지 않은 선대 회장과 달리 평소 실력 있는 여성인재 등용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온 박찬구 회장의 경영철학이 박 씨 지분매입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되기 때문이다.

업황 활개 속 푸념 느는 중견인들 왜

재계황태자의 행보가 언론에 노출될 때 마다 중견업체 대표들의 한 숨도 늘고 있다. 황태자가 관심 있어 하는 사업에 모기업이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해당기업들은 황태자들의 사업을 지원하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경제단체에 지적을 받는 사례가 많았다. ‘일감몰아주기 논란’에 휩싸였던 대기업 계열사들의 지분을 분석해보면 황태자들이 보유한 지분이 많은데, 이 또한 황태자를 돕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황태자들의 역량이 발휘될수록 업황은 커진다는 게 재계의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중견업체들이 설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한 중견업체 A대표는 “자본금을 내세운 대기업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따라서 오너 일가와 싸우는 것 보다 그냥 포기하는게 낫다”고 푸념 했다.

이처럼 중견업체 대표와 같은 푸념이 어제 오늘일만은 아니라지만, 자본금 보다 무서운 오너일가의 사업 추진 소식에 중소경제인들은 위축되고 있다.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