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청와대 앞으로!!

2005-04-15     정혜연 
재벌그룹 총수는 물론, 전문 경영인들까지도 노무현 정부와의 ‘거리 좁히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다. 그동안 재벌그룹과 노무현 현정권과의 다소 껄끄러웠던 관계와 비교해보면 엄청난 변화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먼저 손을 내민 쪽은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은 지난 2002년 출범 당시 ‘안티재벌’, ‘친노조’ 성향으로 인해 사사건건 재벌그룹과 대립했으나, ‘경제회생’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재벌그룹에 화해의 손짓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재벌그룹 역시 노무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고 얘기한다.

특히 최근에는 재벌그룹과 노무현 대통령의 협력관계가 무르익자, 그룹들끼리 좀 더 현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재벌의 이같은 변신은 무엇 때문일까. 재벌의 속성상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정치권과 재계의 분석에 의하면 최근 재계의 기류는 “앞으로 당분간 보수 정당의 집권 가능성이 낮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표적인 보수인사로 알려져 왔던 공병호 자유기업원 원장도 최근 “10년 안에 보수 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자유기업원은 전경련 산하기관이다. 재벌을 대변해 진보정권의 경제정책에 맞서온 공 원장의 이같은 입장변화는 보수색깔의 재벌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같은 기류변화가 재벌들을 청와대 앞으로 향하게 만드는 가장 큰 배경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풀이한다.‘빅 4’의 변신은 생존 위한 ‘이유있는 변신’‘친노재벌’로의 탈색에 가장 앞서고 있는 곳은 재계의 ‘빅 4’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이다. 이들 그룹은 청와대 앞으로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줄타기 전쟁’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회장님’들의 돌격전쟁은 어떻게 펼쳐질까.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재벌에 대한 시각은 분명히 달라졌다. 지난 2002년 12월 20일.노무현 대통령(당시 대통령 당선자)은 향후 재계와 어떤 관계를 가져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다소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노무현 당시 당선자는 “재벌 시스템을 확실하게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재계 관계자들은 불안감이 드러워진 표정이었다.

노 당선자의 말에 대해 재계의 대변인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발끈했다. 손병두 당시 전경련 상근 부회장은 “재벌시스템은 이미 충분한 수준으로 개혁됐고, 오히려 개혁이 지나친 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안티재벌’ 성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2003년 7월.노무현 대통령은 한 모임에 참석해 “시장을 지배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된다”며 묘한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 당시 재계는 반색했고, 노동계는 경악했다. 그랬던 그가 요즘은 완전히 변했다. 재계의 각종 행사 참여, 재벌그룹 회장과의 독대 일정에 바쁜 나날을 보낼 정도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재계도 변했다. 전경련의 조건호 부회장은 지난 7일 “정부와 대립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는 향후 재계가 노무현 정부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임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변신, 그리고 재벌그룹의 잇따른 화답인 셈이다.향후 재계와 노 정권은 어떤 관계를 유지해 나갈까.최근 재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유럽 공식 답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일 터키와 독일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은 국빈, 터키는 공식 방문이었다. 그런데 이 날 노 대통령의 비행기에는 수십명의 유명인사들이 함께 했다. 각종 경제단체의 단체장을 비롯해, 재벌그룹 회장들이 동행한 것. 강신호 전경련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이수영 경총 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등이 함께 했다. 재계 리더격인 이건희 정몽구 회장 행보 주목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큰관심을 끈 사람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었다. 이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외국 순방에 노 대통령과 동행하는 것은 아니다.

정 회장과 최 회장은 지난해 9월 대통령 러시아 순방길에도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 방문과 이번 방문은 차이점이 있다. 지난해 9월 러시아 순방은 양국 기업들의 대규모 프로젝트 계약이 몇 건 있었다. 이번에는 양국 정상간의 통상적인 자리여서, 굳이 재계의 회장단이 총출동할 필요까지는 없다. 정 회장과 최 회장이 주목을 받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경우는 현재 외국 출장 중이어서 노 대통령과 함께 출장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지에서 합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삼성그룹의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유럽에 머물고 있어 현지에서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른바 재계의 ‘빅4 회장’ 중에서 세 명이 경제사절단에 포함된 것이다.

빠진 사람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유일했다. 하지만 구 회장 역시 이번 순방 모임에는 합류하지 않았으나,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등 LG그룹의 핵심 인사들을 함께 보내 노무현 대통령을 응원했다. 대리 출석한 셈이다. 그러나 ‘빅 4그룹’의 총수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와 비교해볼 때 가장 변한 재벌 총수로 꼽힌다. 사실 이 회장으로서는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미국 대사에 발탁됨에 따라 노무현 정권과의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다. 그는 직설적 화법으로 경제전반과 그룹의 사안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일례로 꼽혔던 사건은 이건희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한 장의 초대장이었다. 지난 3월 이 회장은 노 대통령에게 공식적인 업무와는 별도로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싶다는 뜻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노 대통령은 흔쾌히 수락했다. 결국 지난 3월13일 일요일 한낮에 이 회장 가족과 노 대통령 가족의 개인적 만남이 주선됐다.

이 날 노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딸과 함께 삼성박물관인 ‘리움박물관’이 위치한 한남동을 찾았다.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씨가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재벌총수와 현직 대통령의 ‘개인적 만남’은 2시간 넘게 이어졌고, 줄곧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과 노 대통령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계에서는 재계와 그룹의 현안에 대해 어느 정도 얘기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며 나름대로의 ‘외교’를 하고 있다면,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저돌적인 편이다. 정 회장은 이번 대통령과의 유럽 순방길에 계열사 사장단을 대거 동원했다. 정 회장 본인은 물론이고, 정순원 로템 부회장, 최재국 현대차 사장, 최한영 기아차 사장 등 계열사 사장단을 모두 동원한 것. 삼성, LG, SK 등과 비교해볼 때 수적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을 보내 노 대통령 힘 실어주기에 나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정 회장은 지난 3월에는 아예 자사에서 생산한 차를 직접 끌고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3월11일이었다. 이 날 정 회장은 현대 기아차가 개발한 친환경 자동차 ‘투싼’을 직접 끌고 청와대를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과 이 차를 타고 청와대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의 이런 저돌적 외교에 대해 ‘현대 스타일답다’는 얘기를 하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구본무 최태원 회장 거리좁히기 안간힘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노 정권과의 거리 좁히기에 나섰다. 구 회장이 독자적인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전경련과 사이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 회장은 벌써 수 년째 전경련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있고, 아울러 이건희 회장, 정몽구 회장 등 회장들과 접촉을 자제하고 있다. 결국 그로서는 홀로서기 방식으로 노 정권과 코드를 맞출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구 회장은 재계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재벌그룹 회장들로부터 가장 부러움의 눈길을 받았던 사람이다. 재벌과의 거리두기를 기조로 삼았던 노 대통령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사람이 구 회장이었다. 구 회장은 재계 총수들 중에서 최초로 지난 2003년 노 대통령과 ‘독대’ 했고, 지난해 9월 인도 출장에 ‘빅4’ 중 유일하게 참석해 노 대통령과 같이 지내기도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들 중에서 가장 소극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이들 그룹 회장 중에서 가장 연배가 낮은 젊은 총수이다보니, 튀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았겠느냐는 시선이다.

최 회장은 이같은 이유 때문에 노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독대’하거나, 집으로 초청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그는 노 대통령과 만날 수 있는 공식 행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는 편이다. 최 회장은 이번 유럽 출장은 물론, 각종 외국 출장길에 SK그룹과 딱히 연관있는 사안이 없더라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는 젊음을 앞세워 친노그룹 386세대와의 친분쌓기에 관심이 많은것으로 전해진다.현재로서는 재계의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재계와 현정부간에 만남이 잦은데다, 가장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봄이 재벌 총수들에게 따뜻하게 기억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