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편견과 차별에 두 번 죽었다”

2005-06-14     이수향 
현재 정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국내 에이즈 감염인의 숫자는 약 3천명 정도로 지난 85년 국내에서 첫 감염인이 발생한 이후 이들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며 정부차원에서 추진하는 감염인 인권대책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에이즈의 실체에 대해서조차 정확히 알고있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에이즈는 체내의 세포면역 기능이 뚜렷하게 떨어져 각종 감염이 발생하는 질병임에도 문란한 성생활이나 동성애로만 발병한다는 오해를 뒤집어쓴 채 윤리적으로 지탄받아왔다.

또 가까이 가기만해도 옮는 무서운 전염병 혹은 온 몸이 반점으로 뒤덮여 고통스레 죽어가는 병으로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에이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감염인들은 사회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핵폭탄’의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감염인들이 홀로 세상의 편견과 병마와 싸우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국내 에이즈 감염자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등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으며 인권을 향한 그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세상밖으로 퍼져나오고 있다.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

“HIV도 과연 당뇨나 고혈압처럼 만성질환인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현재 투여중인 약물로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에이즈 감염인을 위한 모임 ‘러브포원’에 올라온 한 감염인의 사연이다. 이 사이트에는 이처럼 에이즈 감염인으로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그들만의 삶의 희로애락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사이트 운영자 박광서(34)씨는 자신이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몇 년 전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모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세상에 당당히 ‘커밍아웃’을 선언한 국내 거의 유일한 에이즈 감염인이다.

이처럼 위험한(?)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그는 “감염인들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박씨는 9일 전화통화에서 “에이즈 감염인들은 여느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에이즈에 감염되면 외모적으로 확연히 표시가 난다거나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편견”이라며 “다만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져 지속적인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 설명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그는 요즘도 사회활동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통화내내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차분했으며 여느 일반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화도중 그는 “무심코 튀어나오는 편견과 무지, 잘못된 상식들이 우리들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무심코 튀어나오는 편견과 무지에 상처

커밍아웃 후 에이즈와 관련된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박씨가 처음부터 지금처럼 평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전. 그의 나이 불과 22살 때였다. 교통사고로 입원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사회의 편견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지독했으며 좌절과 방황의 나날이 계속됐다. 결국 그는 아예 ‘커밍아웃’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박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내가 에이즈 감염자라는 것을 차라리 속시원하게 밝히고 조용히 죽으려 했었다”는 말로 그간의 고통을 드러냈다.

현재 에이즈 관련 활동을 하면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 커밍아웃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팽배한 사회의 편견과 개인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 그러나 그는 “커밍아웃 후 에이즈 관련 일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씨에 따르면 에이즈는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서 더 상처를 받는다. 박씨가 전하는 감염인들의 가장 큰 고민 역시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신분노출’과 ‘가족과의 관계’부분이다.

그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움츠러들고 심지어는 같은 감염인들까지도 만나기를 꺼려하는 분들도 있다”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으면…’하는 생각에 마음이 저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에이즈를 오랜시간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마라톤’에 비유한 박씨는 “감염자들은 사소한 사회적 편견에 혼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완치는 어렵지만 치료제를 제대로 복용하면 발병하지 않고 오랫동안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며 더 이상 세상의 그릇된 편견에 감염자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로 말을 맺었다.

# 감염인 박광서씨 인터뷰, 감염인 숫자 상상초월 공식수치의 최대 10배

에이즈 감염인을 위한 온라인 모임 ‘러브포원’은 99년에 오픈한 국내 최초의 HIV 감염인 사이트다. 운영자 박광서씨는 매월 정기 모임을 통해 정보를 나누거나 감염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상담을 실시하는 한편, 동료 감염인의 병원 진료에 동행하거나 입원 중인 환우를 방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사이트를 개설하게 된 계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국제 에이즈회의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 에이즈에 감염된 남아공의 11살 소년이 개막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 감염인 본인이 직접 나서 활동하는 이유는.▲ 이 사이트를 통해 많은 감염인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길 바라는 취지다.

- 회원들은.▲ 현재 약 750명 정도로 20~30대 남자가 가장 많다.

- 정기모임도 갖는 것으로 아는데, 얼마나 모이나.▲ 한달에 한번씩 갖는 정기모임이 있다. 직접 모임에 나오는 회원들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많을때는 30명 정도가 모이기도 한다.

- 상담 내용은.▲ 초기감염자들은 많이 힘들어한다. ‘감염이 반드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인지시키며 심적 안정을 돕는다.

- 사회생활은 가능한가.▲ 정도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는 분도 있고 하지 못하는 분도 있다.

- 국내 에이즈 환자수를 얼마로 추정하는가.▲ 공식적으로 집계된 수치보다 훨씬 많은 8천명정도로 보고있다. 일부에서는 감염자 수를 공식 수치의 최대 10배까지 보기도 한다.

-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검사를 받지 않은 이들 모두가 에이즈 감염자가 아니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에이즈 검사를 받아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무지에서 나오는 편견의 대표적인 예다. 에이즈 감염자 통계를 보면 동성애자보다 이성애자의 비율이 훨씬 높다.

- 바램이 있다면.▲ 감염인을 특별한 질병이 아닌 하나의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