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①]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가난 피해 향했던 일본, 그곳에서 롯데의 시작 알리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다섯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유통업의 선두주자인 기업 ‘롯데’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1922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무수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맏이는 숙명적으로 가난의 설움을 받아들여야 했고, 소년 신격호 역시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부귀다남(富貴多男)이란 네 글자를 신명처럼 받들고 갈망하던 시대에 다른 어머니들도 그랬지만 신격호 어머니 역시 여러 동생을 출산해 신격호를 큰형과 큰오빠로 만들어줬다. 당시 사람들의 절실한 꿈이 있었다면 온 식구가 하얀 쌀밥을 실컷 먹어 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언양 장날 왕소금에 절인 자반고등어 몇 마리만 사와도 군침이 감돌았고 공연히 신바람이 나던 때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지게를 지고 소꼴(풀)을 베어 오고 뒷동산에 올라가 땔감을 한 짐씩 지고 내려오던 신격호.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마주한 초라한 밥상 위에는 파리 떼가 춤을 추는 보리밥 한 그릇에 소금물에 절인 통무 김치와 된장뿐이었다. 기름진 육류나 생선 한 토막은커녕 마른 멸치 한 마리도 실컷 먹을 수 없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인근 부락에 있는 삼동보통학교를 4년간 다니면서 소년은 ‘이 가난을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 청소년들이 같은 생각을 했지만, 신격호의 포부와 꿈은 남달랐다.
가난한 농가의 맏이로 태어나
가난이 너무 싫었던 신격호는 열아홉 살 어느 날, 성공을 위해 가출을 결심했다. 사촌 형님이 아버지 모르게 마련해 준, 당시 면서기의 두 달 치 봉급인 83엔을 손에 쥐고 울산 문수산 언저리를 넘어 일본 후지산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부산항 선청가에서 신격호는 하라는 농사일은 안 하고 말도 없이 가출해 버린 큰 아들의 불효로 인한 화난 아버지의 얼굴과 마을 어귀까지 주먹밥을 들고 나와 아들의 성공을 빌던 어머니의 얼굴이 파도 위로 겹치면서 눈시울이 젖어 왔다.
“지금쯤 둔터에는 진티댁 큰아들 격호가 농사짓기 싫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쫙 퍼졌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성공해야 한다. 일본까지 가서 성공하지 못하고 귀향한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제 나는 둔터 ‘촌놈’을 벗어나 스스로 알을 깨고 날개를 퍼덕이며 바다 위를 훨훨 나는 갈매기처럼 일본이란 미지의 땅에서 청춘을 불태우고 꿈을 펼쳐야 한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우여곡절의 세월 속에 신격호는 와세다고등공업학교(지금의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고물상 주인이 찾아왔다. 하나미쓰(化光)라는 60대 남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잠시 인연을 맺었던 신격호를 대단히 신임하고 있었다.
하나미쓰는 “군수용 커팅 오일이 품귀 상태라네. 만약 자네가 공장을 차려 제조해 보겠다면, 5~6만 엔 정도 출자할 용의가 있네. 물론 수요처는 내가 주선해 주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며 사업을 제안했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에 신격호는 몹시 흥분했다. 당장 도쿄오오모리 지구에 적당한 공장건물을 얻었다. 그러나 신격호의 첫 사업은 불운했다.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도 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공장이 불타고 말았다. 흔히 말하는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러나 ‘절망의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이 그를 바로 잡았다.
‘이만한 일로 주저앉으면 신격호가 아니지.’
이번에는 주오선(中央線) 주변의 하치오지 지구에 공장건물을 빌려 다시 커팅 오일 제조에 들어갔다. 커팅 오일은 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이다. 당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 본 기억이 없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그의 공장은 또다시 B-29 폭격을 받아 건물·기계·원료가 전소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소이탄 공격으로 도쿄 일대가 불바다가 됐다. 사이판을 함락시켜 비행장을 확보한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을 목표로 삼고 도쿄 근교의 공장지대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한 것이다.
1945년 8월로 접어들면서 전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사흘 뒤인 8월 8일엔 소련이 대일 참전을 선언했다. 그 이튿날 미군은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화장품 제조로 다시 일어나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구축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신격호는 일왕 히로히토의 이른바 항복 방송을 하치오지의 폐허 속에서 들었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고는 하나미쓰 노인에게 빌려 쓴 6만 엔(출자금 5만 엔과 그 후에 빌린 1만 엔)의 차용증서뿐이었다. 청년이었던 신격호에겐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해방이 되자 재일동포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고 함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자”며 권유했지만 신격호의 가슴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해방은 됐지만 고국에 돌아가도 가난뿐이다. 아버지도 모르게 가출한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체면이 서지 않아. 어떻게든 일본에서 살아남아 승부를 걸어보는 거다.”
그에게 당시 결심은 극심한 갈등이었고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신격호는 즉시 도쿄의 스기나미구 ‘오기구보’에 있는 군수공장의 기숙사 자리에다 다시 사업장을 차렸다. ‘히카리(光) 특수화학연구소’. 이름은 거창했으나 그곳은 전쟁 중 공습으로 반쯤 타버린 허름한 벽돌집이었다. 그의 숙소 겸 공장이기도 했다.
1946년 5월,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친구들이 오기구보의 공장을 찾아와서는 모두 거창한 공장 이름에 입을 벌렸다.
“이봐, 자네 굉장한 간판을 달았군.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건가. 공장이면 공장이지, 연구소라니? 자네 속셈이나 한번 들어보세.”
신격호의 대답은 진지했다.
“패전 직전까지 선반용 기름을 만들어 판 경험이 있거든. 바로 그 커팅 오일로 이번에는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 작정이야. 지금 생활물자가 극도로 부족하니까 만들어 놓기만 하면 팔릴 테니 두고 봐.”
커팅 오일에서부터 세탁비누·세숫비누·포마드·크림 등 유지(油脂)제품을 만들어 내는 공정은 응용화학을 전공한 그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장품 제조라지만 지금까지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커다란 솥에다 응고제와 약간의 방향을 혼합해 제품을 생산하는 가내 수공업 규모였다.
그가 만든 화장품은 비록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물자가 부족한 시대여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납품과 수금을 하기 위해 하루 200군데의 상점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야 했다. 상인들 가운데는 미리 선금을 맡기고 나중에 물건을 받아갈 정도였다.
화장품 제조사업자로 성공한 신격호는 일본인 은인인 ‘하나미쓰’에게 빌린 돈 6만 엔을 공장 가동 1년 반 만에 모두 갚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다가 화장품 사업을 벌여 1년 반 만에 빚 6만 엔을 모두 갚고 하나미쓰 선생께 집을 한 채 사드렸다. 사업을 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 어른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격호는 자신의 새로운 도전정신과 아이디어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사업의 묘미를 터득하게 됐다. 사업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은 첫째 시의 적절한 상품 개발, 둘째 수요를 기민하게 읽는 시장 파악력, 셋째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추잉껌과의 운명적인 만남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신격호의 공장에 놀러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영문자가 쓰인 추잉껌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어이 친구, 이거 추잉껌이라는 건데 한번 씹어 보지 않을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거야.”
신격호는 포장지를 벗기고 알맹이를 꺼내 입에 넣었다. 어릴 때 둔기 밀밭에서 밀을 씹어 껌을 만들던, 아니면 산에서 송진으로 껌을 만들어 씹던 것이 껌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던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 듯 한 단맛에 혓바닥을 몇 번 굴리다가 그만 꿀꺽 삼켜 버렸다.
“친구, 껌은 삼키는 게 아냐! 씹다가 단물이 다 빠지면 뱉어 버리는 거야.”
그러나 신격호에게 단맛이라고는 어릴 적 소풍날이나 운동회 때 아버지에게 얻은 용돈으로 ‘오다마’사탕을 사먹던 일, 그리고 헌 고무신을 들고 달려가서 엿장수 아저씨에게 호박엿을 바꿔 먹던 게 전부였다.
“껌이란 게 이렇게 좋은 과자인가? 아이들이 홀딱 반하는 것은 당연해.”
이때 청년 신격호에게 껌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일까?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이번에는 미국제 추잉껌을 흉내 내어 직접 풍선껌을 만들고 있던또 다른 친구가 찾아왔다.
“이봐, 화장품 말고 껌 제조 사업 한번 해 볼 생각 있어?”
일본은 전쟁 이후 기호품이 부족하자 일부 업자들이 껌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풍선껌은 원료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마솥과 요리 칼만 있으면 누구라도 간단히 제조할 수 있었다.
원료는 비행기의 바람막이 유리를 사용했다. 제조법은 방풍 유리를 녹인 초산(酢酸) 비닐수지와 송진, 그리고 도료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이는 방식이었다. 그런 다음 사카린이나 둘찐(벤젠을 원료로 한 설탕 대용물)으로 단맛을 내고 바나나 냄새 비슷한 향료를 첨가했다.
이렇게 걸쭉하게 된 액체를 나무판에 흘려보내 굳힌 다음, 요리 칼로 잘게 절단해서 포장을 하면 완성품이 됐다. 그 시절, 일본 전국에서 추잉껌을 만들어 파는 업자는 300~400명 정도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격호는 추잉껌 원료로 외국 제품에 사용되는 남미산 천연수지가 소량이지만 일본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매사에 완벽주의자인 그는 약제사 한 명을 고용했다. 원료 조제에 정확성과 사람들의 건강문제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는 국수를 만들 때 밀가루를 반죽해서 늘이는 수동 기계도 설치했다. 이것을 껌 성형용으로 대신 활용했다. 그러나 남미산 천연수지는 절대량이 부족했다. 원래 천연수지는 전기 절연체나 치과의사가 치형을 뜰 때 치과기공소에서만 사용되던 것이다.
그 무렵 메이커들은 초산비닐수지를 기초 재료로 해서 껌을 제조했다. 초산비닐은 전시 중 미 공군에서 항공 식량으로 침을 삼키게 하는 촉진용으로 사용했다. 신격호도 남미산 천연수지가 부족해 초산비닐수지를 베이스로 껌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1개 2엔짜리 풍선껌이 예상치 못한 큰 인기를 끌었다.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도쿄 일대에 확 퍼지자 과자점 주인들이 줄을 서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청년사장 신격호와 제조사, 그리고 종업원 대여섯 명인 작은 공장은 수요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제조된 껌은 눈 깜짝할 사이 상인들의 보자기나 가방에 가득 담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재고품이 창고에 들어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신격호 자신도 저금액에 놀랐다. 뿌린 대로 거둔 것이었다.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는 비록 작은 수동식 제조공장에 불과했지만, 이것은 오늘날 롯데그룹의 모체가 됐다. 신격호가 사업의 의미를 터득한 곳도 이곳이었고, 오늘날 롯데그룹 사훈이 된 정직·봉사·정열 이라는 경영이념 역시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무렵 그는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지금의 개인사업 형태로는 이 이상 발전하기 어려울 거야. 이젠 회사를 만들어야지. 현실에 맞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비전 있는 사업을 해야지.” 신격호의 가슴에 야심이 이글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청년 辛格浩, 서진모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