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2006-01-17     이수향 
지난 93년 대모산에서 실종돼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유모 변호사 실종사건’과 함께 법조계의 2대 미스터리로 꼽히고 있는 이종운(당시 33세) 변호사 실종 사건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실종된 이씨의 인감증명서를 위조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10년을 선고받은 약혼녀가 항소심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됐기 때문.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1부(최재형 부장판사)는 11일 약혼녀 최모(31)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물증없이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의 형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러나 여전히 미궁속에 남아있는 이 사건은 단순 실종으로 보기에는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적지 않다.사법연수원 31기로 서울 P법무법인에 근무하던 3년차 변호사 이씨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2004년 7월 29일. 일주일간의 여름휴가를 이틀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씨는 이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의문의 실종 >머리를 식힐 겸 이씨가 혼자 휴가를 떠난 것으로 생각한 가족들은 휴가가 끝나도 이씨가 돌아오지 않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당시 이씨는 명문여대를 졸업한 최씨와 약혼한 상태로, 두달 뒤에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가출로 처리했으나, 가족들은 이씨가 잠적할 이유가 없다며 수사를 촉구했다.그러나 약혼녀 최씨의 주장은 달랐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씨가 자신에게 ‘큰 집을 사오라’, ‘자동차를 바꿔달라’고 하는가 하면, 변호사 개원을 목적으로 큰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자신이 이를 들어주지 못하자 이씨가 결혼을 피해 잠적한 것이라고 진술한 것. 최씨는 또 실종 직전 이씨가 현금 5,000만원을 요구해서 줬는데 이 돈으로 이씨가 잠적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실종 한달 후 이씨의 시골집에는 이씨를 자칭한 남성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잘 지내고 있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최씨는 이씨가 자신에게 보내왔다며 경찰에 팩스를 제출했다. “다른 여자가 생겼으니 다른 남자를 만나 잘 살라”는 게 주 내용이었다. 최씨의 진술과 이씨로부터 걸려왔다는 전화, 자필 팩스 등으로 보면 이 사건은 결혼을 앞둔 변호사가 탐탁지 않은 결혼조건을 핑계삼아 약혼녀를 버리고 잠적한 것으로 치부될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강한 의문을 제기했고, 최씨는 이씨의 실종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으며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약혼녀에게서 의심스런 정황포착

이러한 의혹들은 경찰 수사결과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최씨와 이씨는 2003년 11월 이미 혼인신고가 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가족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혼인신고서의 남편 연락처란에 낯선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던 것. 최씨는 서류작성 순간 이씨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동료의 번호를 기재했다고 했지만, 경찰조사 결과 이 연락처는 최씨와 동거중이던 나모씨의 것으로 밝혀졌다. 최씨는 이씨가 실종되기 수개월전부터 나씨와 동거하는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이었다. 최씨의 의심스런 행동은 이씨의 실종전부터 포착됐다. 최씨는 이씨가 실종되기 한달전, 사망이나 실종시 최고 15억원을 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에 가입토록 하고 수익자를 자신으로 했다.

이씨가 재해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지 2년이 지나면 이 보험금은 최씨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최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계속 포착됐다. 최씨는 이씨의 실종 이틀 만에 이씨의 카드로 명품 가방 등을 사는 데 800여만원을 사용하는가 하면, 이씨의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돌려버렸다. 또 인터넷 구직광고를 통해 사람을 섭외, 이씨의 행세를 하도록 해 이씨의 인감증명을 발급받아, 이씨가 가입된 직장보장보험의 수익자를 자신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씨는 이씨 소유의 오피스텔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다 어렵게되자 전세를 놓아 6,000만원을 받아 챙기고, 이씨의 자동차를 1,000만원에 팔아 넘기는 등 이씨 소유의 부동산과 동산 등을 현금화했다.

풀리지 않는 의혹들

당시 최씨는 경찰조사에서 “결혼을 약속해놓고도 결혼을 피하는 이씨에게 화가 나 이런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씨의 가족들은 이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평소 소탈하고 강직한 성품인 이씨가 결혼을 명목으로 거액의 금품을 요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 “결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자신의 오피스텔을 약혼녀 명의로 해줬겠느냐”며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최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결국 경찰은 이씨의 실종에 최씨가 연관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재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진다. 실종자 이씨의 실거주지는 가족이 사는 집이고 주민등록상의 거주지도 그곳인데, 어느날 갑자기 이씨의 주소지가 약혼자 명의의 오피스텔로 이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피스텔에는 최씨가 세를 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씨는 주민등록지를 말소당한 상태였던 것. 이씨의 주소지 말소를 위해 동사무소를 찾아가 이씨의 실거주 유무를 확인토록 한 인물은 최씨로 밝혀졌다.또 경찰이 최씨의 가택을 수색한 결과 이씨의 주민등록증과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로 발급받은 이씨의 인감 증명서 등이 발견됐다. 또 글자들이 오려져 있는 이씨의 수첩이 발견됐는데, 이씨가 보냈다는 팩스는 최씨가 수첩에 나와 있는 이씨의 자필문구들을 오려내 조합한 것이었다. 또 이씨의 실종 한달후 이씨의 아버지에게 이씨를 사칭, 다른 여자가 있다고 전화한 남성 역시 최씨가 30만원을 주고 길거리에서 섭외한 인물로 드러났다.

심증은 있지만…

경찰은 이씨 실종과 관련된 직접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검찰은 최씨를 상대로 사기와 사문서 위조 등 5개 혐의만 적용해 기소했고, 1심 법원은 사기죄 법정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혹스런 정황들이 밝혀졌다 해도 물증이 없다는 점에서 이씨가 실종사건에 직접 연루됐다는 정황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씨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또 시사 프로그램에까지 방영된 이 사건을 두고 네티즌들은 이씨 실종에 최씨가 연루됐을 가능성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현재 2심에서 최씨의 형량이 대폭 감형된 것을 두고 네티즌 사이에서는 뜨거운 공방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