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황우석 사단인데 결혼하자”
2006-01-17 정은혜
유학 채팅 사이트에서 A양 만나
경찰에 따르면 이 웃지못할 사건은 박씨가 지난해 4월 인터넷 유학 채팅 사이트에서 A양(30)을 알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미혼인 A양의 신분은 디자이너. 채팅 사이트에 기록된 그녀의 프로필이 맘에 든 박씨는 “나는 황우석사단 출신 연구원”이라며 A양에게 은근히 접근해 왔다. 또 “서울 명문 의대를 나와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박씨의 말에 A양도 관심을 나타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남을 거듭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박씨의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 뛰어난 학벌, 신사다운 매너 등은 A양의 동경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넉넉한 돈 씀씀이까지. A양은 박씨가 ‘의사’임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박씨에 대해 ‘호감’을 넘어 ‘환상’까지 갖게 된 A양은 이후 그의 어떤 거짓말에도 쉽게 넘어갔다. “내년에 미국으로 유학 갈 예정이다. 결혼해서 함께 가자”고 유혹하는 박씨와 A양 사이엔 자연스레 혼담이 오갔다. A양의 ‘OK’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박씨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A양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것. 결혼을 전제로 하는 성관계는 과연 믿을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박씨를 너무 사랑해서일까. A양은 박씨에게 너무도 쉽게 몸을 허락했다. 마침내 박씨와 A양은 지난해 8월 결혼식을 올렸다. 겉보기엔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의사와 잘나가는 디자이너의 남부러울 것 없는 결합이었다. 박씨는 서울 모처에서 돈을 주고 가짜 부모님과 하객을 동원했다. 박씨는 특별히 가짜 하객들에게 “의사동료 행세를 하라”는 등 치밀한 지시도 잊지 않았다.
박씨가 A양을 상대로 교묘히 의사 행세를 할 수 있었던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졸의 학력이긴 했지만 황우석 신드롬 시기와 맞물려 인터넷엔 온통 생명공학 관련 지식이 봇물을 이루고 있어 이쪽 분야에 자연스레 공부가 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A양이 박씨에게 ‘과거’를 물을 때면 명문 S대 총장의 직인을 위조해 가짜 S대 졸업증명서와 성적표, 장학금 수령영수증 등을 만들어 갖고 다니며 눈으로 확인시켰다. 박씨의 이런 모습에 A양은 전혀 의심을 품지 못했다. 결혼을 한 뒤 박씨는 A양으로부터 결혼비용 등의 명목으로 260여 만원을 뜯어냈다. 여기에 보탬이 된 것은 A양의 어머니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했던가. ‘의사’ 사위인 박씨에게 장모는 돈을 냉큼 내줬다.
신분 들통나자 또다른 사기극 벌여
그러나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로 감춰야 했고 이 과정에서 아내 A양은 박씨에 대한 의심을 조금씩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A양이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본 결과 박씨와 자신의 관계가 ‘남남’으로 나오자 A양의 의심은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결혼 후 바로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한 남편이었기에 A양의 배신감은 더욱 컸다. 이후 A양이 S대 병원에 박씨의 근무 여부를 조회하면서 그의 실체는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기결혼’을 계획했던 박씨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박씨의 ‘사기결혼’이 2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박씨의 사기극이 막을 내릴 리 만무했다.
박씨는 또다른 사기극을 꾸미기 위해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박씨는 같은 사이트 내서 비슷한 레퍼토리로 몇몇 미혼녀들을 속이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하버드 의대를 나와 황우석 사단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모제약회사 연구소에서 일한다’ ‘내년에 미국으로 유학 갈 예정인데 함께 가자’ ‘사랑한다면 혼전 성관계를 갖자’ 등등.박씨는 수시로 여성들의 집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명품 가방과 벨트, 액세서리 등 700여만원 어치의 금품을 훔치기도 했다. 그로부터 2개월의 시간이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2명의 미혼여성에게 사기행각을 벌이며 활개치고 다니던 박씨에게 경찰이 찾아 온 것은 지난 12월.
그간 속아왔던 것이 너무나 원통했던지 A양이 박씨를 사기죄로 고소했던 것이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황우석 사단 연구원’ 행세를 해온 박씨는 탁월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키가 크고 언변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박씨는 절도 혐의로 수감 생활을 하다 지난해 4월 가석방된 전과범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박씨의 수첩에 40여명 이상의 여성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피해자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박씨의 교묘하고 지능적인 사기행각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피해자들 대다수가 고소를 꺼리고 있어 수사 확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