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발바리’ 모방 범죄 신드롬

2006-02-06     정은혜 
‘밤 12시 도시의 한 원룸촌 골목. 귀가하던 한 여자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만 자리잡고 있을 뿐 주위엔 아무도 없다.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 뒤돌아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여는 순간, 흉기를 든 한 남자가 나타나 야수처럼 덤벼든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이불로 가린 뒤 성폭행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저항도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의 욕정은 그칠 줄 모른다. ‘일’을 마친 남자는 어둠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며칠 후 인근지역의 한 다세대 주택. 남편이 출근한 뒤 문단속을 미처 하지 못한 한 주부가 낮잠을 자고 있다. 해가 중천에 뜬 벌건 대낮이지만 낯선 남자가 흉기를 들고 침입해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남자는 수건과 커튼을 찢어 주부의 얼굴을 가리고 옷을 벗긴 뒤 욕구를 채우는데 여념이 없다. 금품을 뺏은 후 남자는 현관문을 통해 태연하게 빠져나간다.’‘상상’이 아니다. ‘실제상황’이다. 이는 전국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는 연쇄 성폭행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최근 일명 ‘발바리’로 불리는 연쇄 성폭행범이 전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날뛰고 있다. 그 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지금까지 밝혀진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근 서울 강북 일대에 잇따르고 있는 성폭행 사건도 그 일부분인 셈이다.

‘발바리’범행 수법 알려진 후 모방범죄 기승

지난해 1월부터 시작된 ‘서울 발바리’의 연쇄 강도·강간 행각은 유전자 감식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12건에 이른다. 경찰은 성폭행범죄의 특성상 신고하지 않았거나 유전자가 채취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하면 발바리의 범행이 수십 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사건의 범행 수법이 ‘대전 발바리’의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 경찰에 따르면 그가 범행한 곳은 문이 열려 있는 원룸 및 다세대 주택이었다. 대상은 주로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여성. 19세 여고생부터 47세 주부까지 불특정 다수를 노렸다.

또한 범행시각도 대낮부터 새벽까지 일정치 않았다. 처음에는 유흥가 아가씨들이 퇴근하는 새벽 4시에서 오전 9시 사이에 집중됐다. 그러나 이후 초저녁에 혼자 귀가하는 여성, 대낮에 집을 지키는 주부 등 영역을 넓혀나갔다. 경찰은 처음부터 ‘대전 발바리’의 수법을 모방해 범행을 저질러온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피해여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못 보도록 이불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범행 후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못하도록 피해자들의 휴대폰을 숨기고 금품을 가지고 달아난 점은 ‘대전 발바리’의 전형적인 수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에 대해 경찰은 “발바리의 모든 범행 수법 등이 알려진 이후 이와 유사한 모방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범행 장소 물색은 물론이거니와 만행을 저지르고 난 뒤의 은폐 방법까지 유사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범행 수법 내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보도가 모방범죄를 키우고 있다”며 우려했다.

범행후 3~4개월 잠복, 경찰들 농락

그렇다면 이처럼 ‘발바리’가 서울 강북 일대에서만 활개치고 다니는데도 검거가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경찰은 “범인은 한 번에 여러 건의 범행을 저지르고는 3~4개월씩 잠복기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경찰수사가 맥이 풀리고 잠시 느슨해지면 어김없이 또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영악한 면이 있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실제로 범인은 지난 7,8월 경찰들이 주야로 잠복했을 당시엔 종적을 감추어 경찰들을 농락해 왔다고 한다.또 그는 “현장에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는 점으로 보아 ‘발바리’는 아주 치밀하고 영리한 인물로 추정된다”며 “범행 행태로 보아 초범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항상 장갑을 끼고 범행을 저질렀다. 지문 등 아무런 단서도 입히지 않고 피해여성들에게 어떤 상해도 남기지 않은 점은 범인의 ‘용의주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피해여성들 대부분이 얼굴이 가려진 상태에서 범행을 당해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경찰 수사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한 수사관계자는 “‘발바리’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밝힌 범인의 인상착의도 엇갈리고, 피해자들의 진술도 달라 용의자를 추정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며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과학수사기법까지 동원 범인 검거에 필사적

현재 경찰은 범인 검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태. 한명의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마포·서대문 경찰서는 수사본부를 설치, 70~80명의 인력을 투입해 샅샅이 뒤지고 있다. 여기에 DNA 검사, 영상데이터베이스 시스템 등 과학수사기법까지 동원됐다. 형사들이 수집한 120만 건에 이르는 통화내역 일지도 분석하고 있다. 경찰서 한 관계자는 “이와 함께 목격자의 진술을 근거로 몽타주를 작성, 연쇄 성폭행범의 윤곽이 좁혀지고 있다”며 “조만간 강북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범인을 붙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호신·방범용품 판매량 증가

최근 ‘발바리’의 공포가 확산되면서 웃지못할 새로운 풍속도가 생기고 있다.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의 경우, 독신 생활보다는 2~3명씩 함께 공동 생활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이때 근처의 친구들이나 업소 매니저 등과의 비상 연락망을 서로 공유해두는 것은 필수. 또 그날 번 돈은 무조건 은행에 입금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는 후문이다.

혼자 자취를 하는 여대생의 경우, 친구들과 함께 공동 생활하거나 아예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독신 생활이 아니면 발바리가 침범하지 않는다는 입소문 때문이다. 이렇게 성폭행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다 보니 호신·방범 용품 판매도 늘고 있는 추세다.인터넷장터 옥션에 따르면 연쇄 성폭행 사건이 보도된 지난해 12월 이후 호신·방범용품 판매량이 40% 가량 증가해 하루 500여개가 팔리고 있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제품으로는 버튼식 호루라기, 휴대용 가스분사기, 호신 진압봉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