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측 “화집제작 문제로 갈등” VS 연미술측 “터무니없는 소리”

2006-02-21     이수향 
서양화단의 대가 고 오승윤(66) 화백의 자살 원인을 둘러싼 제작사와 유족측간의 마찰이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 고 오지호 화백의 차남인 오화백은 지난 1월 13일 오전 11시 38분께 광주 서구 풍암동의 모 아파트 8층에서 투신자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오화백의 자살원인으로 유족측은 계약관계 및 화집발간을 놓고 제작사의 과실을 지적하는 반면, 제작사측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평소 예술가로서의 삶을 자랑스레 여겨온 오화백이 자살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석연치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오화백이 남긴 유서 및 유족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볼 때 오화백이 평소 앓아왔다는 우울증으로 인해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생전에 화집발간을 둘러싸고 제작사측과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정황들은 자살 동기를 풀 수 있는 핵심키로 여겨지고 있다. 관건은 오화백과 제작사인 연미술이 화집발간을 두고 맺은 계약내용. 지난 2003년 오화백은 화집 제작사 중 최고로 꼽히는 연미술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는 오화백이 1년에 500만원 상당의 가치를 지니는 작품을 연미술에 제공하면, 연미술은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고 1억원 정도를 투자해 화집을 발간해주겠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연미술은 2004년 3월까지 220쪽 분량의 화집 1,200부를 발간하는데, 2006년까지 오화백의 판화제작 및 판매 독점권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연미술이 화집발간을 이유로 오화백으로부터 가져간 그림은 유화 25점, 드로잉 7점, 판화 원판 37점 등 모두 69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화집은 나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미술측에서는 화집제작을 미뤄왔다는 것이 유족측의 주장이다. 오화백은 화집발간이 미뤄지자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나중에는 제작사에 작품반환을 요구했지만 작품을 돌려받지 못하자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즉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 자살로 이어졌을거라는 것이다. ‘저작권법을 모르는 작가는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었다’. ‘계획적인 계약서다’ 라는 오화백의 유고내용으로 짐작컨대 화집발간으로 인해 오화백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음은 확실해보인다. 특히 오화백이 작업노트와 지인들에게 남긴 메모에 ‘판화는 재판시 증거로 놔둬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화백이 ‘법적조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시한다.

우울증과 자살은 ‘무관’

지역 미술인들과 유족들은 오화백의 자살이 화집제작을 둘러싼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미술협회 관계자들은 ‘화집이 나올때까지는 이미 받은 작품과 200호 내에서 교환할 수 있다’는 계약조항 등이 지역작가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화백의 측근에 따르면 유족측에서도 전시회 및 화집 발간을 조건으로 제작업체와 체결한 계약이 작가에게 애초부터 불리한 계약이라고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 유족측은 제작사와 불평등 계약을 맺은데다 제작 작업의 차질로 발행일이 미뤄지자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오화백이 상심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연미술측에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광주미술협회 박지택 회장은 “오화백의 자살로 현재 미술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있다”며 침통한 분위기를 전했다. 박회장은 제작사와 유족간의 마찰에 대해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에는 거장을 잃은 미술인들의 슬픔이 너무 크다”며 최대한 말을 아꼈다. 유족측에서 연미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박회장은 “지난번에 유족측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했으나, 현재 소송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고 전했다. 현재 미술인들 및 유족들은 오화백의 명예회복을 위한 방안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는 분위기다. 박회장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고인의 명예에 누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며 “법적인 조치로까지 확대되는 불미스러운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그러나 지역미술인들은 오화백의 자살이 제작사측의 부당한 계약 및 비합리적인 대우로 인한 것이라며 반발, 차후 대책을 논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작가들이 중앙에 있는 화랑이나 제작사와 전속계약을 맺을 때 불이익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 박회장은 “지역작가들이 중앙무대에 진출하는데 불이익이 있거나 제작사와 불합리한 계약이 있다는 얘기는 간간이 있었다”이라며 “오화백의 죽음이 그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경우, 사전에 이를 막지 못한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양측주장 ‘팽팽’

한편, 연미술측 입장은 다르다. 연미술측에서는 오화백의 자살원인으로 제작사의 과실이 지적되는 것에 불쾌한 반응을 나타냈다. 14일 연미술의 관계자 A씨는 “화집발간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오화백이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계자는 오화백과 화집제작 계약을 맺은 사실과 화집제작이 미뤄진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나 오화백의 자살이 연미술측의 부당한 계약이나 약속불이행 등으로 인한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는 터무니없다는 주장이다. A씨는 “화집제작이라는 것이 일정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빨라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며 “화집발간이 늦어진 것은 우리측에서 의도적으로 미룬 것이 아니다. 좀 더 좋은 작품을 선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딜레이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요한 것은 모든 진행과정이 오화백과 ‘합의’하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순전히 ‘좀 더 좋은 전시회를 갖자’는 욕심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오화백이 남긴 유고형식의 메모내용에 대해서도 연미술측 입장은 다르다. “평소 우울증을 앓던 분으로 알고 있다. 예술하는 분들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다. 감정의 기복이 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노트에 진행중이던 화집발간 부분에 대한 애로사항을 적어놓는 것은 가능한 일 아닌가. 평소 오화백과 우리측은 친분도 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논의가 오갔던 걸로 알고 있다. 오화백의 메모 내용만으로 제작사측과 오화백의 자살을 연관시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연미술측은 유족측에서 법적소송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 “아직 소송에 대해서는 통보받지 못했다.

우리는 단 1%도 우리의 업무과실과 오화백의 자살이 관련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측에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는 ‘코에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거리’식”이라며 유감스런 반응을 보였다. A씨에 따르면 연미술은 오화백과의 계약과 연관된 모든 사실관계에 대해 유족들에 통보한 상태다. 또 생전에 오화백과 약속한대로 조만간 ‘최고의 화집’을 내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A씨는 “최대한 원만한 선에서 끝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유족측에서 ‘소송’운운하며 ‘막나오면’ 우리로서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상식이하의 행동을 보인다면 최악의 경우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양측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태다. 한 거장 화백의 자살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