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네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특유의 성장모델을 구축한 글로벌 기업 LG다.
“손을 잡고라도 먼저 강을 건너라”
동업의 LG를 얘기할 때 이 말 만큼 가장 정곡을 찌르는 말은 없을 것이다. 수년간 LG그룹의 성장을 주도해 온 기본철학이 바로 합작정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정신은 자신에게 없는 기술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한 합작의 방정식으로 독식하려는 경쟁기업보다 LG를 우위에 올려놓는 전략이 됐다. 또한 밖으로 나갈 때에는 합작사로부터 지원사격을 받는 등 후광효과도 컸다.
LG의 합작은 주로 전자사업 분야와 호남정유(현 GS칼텍스)·한국콘티낸탈카본(럭키소재)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 전사사업 분야는 기술 확보를 위한 제휴가 절실해 많은 신경을 쏟아 부었다. 미국 칼텍스 석유회사와 손을 잡은 호남정유에는 사업 규모가 워낙 컸고, 소재사업의 경우에는 비교적 초창기 사업이었기에 남의 손이 특별히 필요했다.
럭키가 정유 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은 정부의 ‘외자도입법’ 제정과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공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석유사업 진출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제2정유 사업자 선정 시기 당시, 럭키가 칼텍스를 잡은 것은 여러 면에서 탁월한 결정이었다. 원유 공급의 조건부터가 유리했다. 걸프사보다 배럴당 7~9% 쌌고, 유조선 운임 역시 걸프보다 배럴당 20%가 저렴했다.
특히 칼텍스가 제공하는 사업자금 4950만 달러는 5년 거치 12년 상환의 장기 차관이었다. 연리도 5.25%로 미국의 우량업체 대출 금리인 6% 대보다 낮았다. 또한 운전자금으로 차관한 1000만 달러를 원유 매입에 활용할 시 무이자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도로·항만·철도·용수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소요되는 자금 1000만 달러도 연리 5.25%의 저리였다. 이익잉여금에 대한 배당 역시 럭키 대 칼텍스가 8대 2의 비율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 하에 1966년 12월 마침내 럭키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칼텍스와 합작투자협정을 맺고 50%씩 출자해 550만 달러 규모의 호남정유회사를 설립했다.
단기 이익은 아니었지만 럭키나 칼텍스 입장에서는 장기적 이익이 보장되는 정부 인허가 사업에 눈독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때 정부는 왜 정유 산업 민영화를 결정했을까? 이는 정부가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전기·석유 등 에너지 소비가 증대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이전의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개편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2정유사업자 선정 문제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수요자 공무가 발표되었음에도 5개월간이나 선정이 지연되자 정치자금설이 나돌았다. 그 이유는 한국석유공업 개발의 타당성 조사를 맡은 ‘아더 리튼 보고서’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는 “제2정유공장의 시설 규모로 일산 5만5000배럴이 적정하고 제3정유공장은 1971년에 가서나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로서는 막대한 이윤과 거대한 판매고를 지닌 까닭에 민간재벌에 넘길 수 없다는 주장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급격히 늘어나는 정유 수요를 국가 예산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었다.
처음의 의욕과 달리 사업이 진행되면서 막대한 그룹 돈이 정유공장 건설 쪽으로 흘러 들어가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시장 점유율이 80% 대에 이르는 럭키화학 쪽에서 번 돈을 몽땅 정유에 털어 붓는 것에 대해 몇몇 경영층 인사들은 구인회를 붙잡고 “어떻게 된 거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마치 럭키가 번 돈을 금성사가 초기에 집어 삼키는 꼴과 같았다. 이때마다 구인회는 구평회를 통해 “장사를 하던 럭키가 기업을 하는 그룹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정유사업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당시 구인회는 럭키가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과거 치약과 비누·크림 따위를 만들던 때는 더 이상 아니었다.
1968년 8월 구인회는 미국 경영진단 전문가 치커링과 크레이튼을 초청해 그룹의 경영 상태를 관찰케 했다. 그들은 3개월 남짓 분석한 후 두 가지를 건의했다. 그룹 산하에 분산되어 있는 각 사업부 및 제경 부서를 중앙 집중화 하고 럭키화학의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때 비로소 그룹 내부에 기획조정실이 생겨나고, 정부와 원활한 행정기능 수행을 위해 그룹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구상이 마련됐다. 새로 설치된 기획조정실에는 허씨 가문의 수장 허준구가 취임했다. 이로써 양 집안 간 성장을 위한 협력 체계는 더욱 일사분란하게 진행됐다. 해방과 함께 시작한 부산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바야흐로 럭키가 서울 시대를 열어 나가게 된 것이다.
석유사업의 재탐침 작업
LG그룹은 구씨·허씨 간 동업 정신으로 2004년 그룹 분리 시까지 동고동락해 왔다. 이를 두고 성공적인 파트너십이라 부르고 따라 배울만한 모범 사례로 평가하는 것은 동업의 불모지대인 우리 경영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특정 파트너십은 사업을 더 키우기 위해서는 깨지기도 한다는 것을 럭키와 칼텍스의 제휴·협력 관계에서 잘 보여준다.
칼텍스 측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인해 제2정유 공장인 호남정유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 럭키는 석유사업을 해 나가며 두 가지 현장 지혜를 얻었다.
하나는 숙명적인 관계인 유공과의 일전이었다. 유공은 걸프사와 합작투자를 한 상태로 국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싸움을 위해 호남정유는 이이제이 방식을 취했다. 즉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이기는 전략으로, 호남정유가 수입한 원유를 유공에 맡겨 정제케 한 다음, 그것을 다시 호남정유의 대리점을 통해 판매한다는 전략이었다.
호남정유로서는 유통망이 없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 위탁가공을 통해 석유 제품을 마련하고 남의 유통망을 통해 도강 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인허가권을 부여하는 사업의 특징은 정부 스스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정유·통신·카지노 등 정부 인허가사업은 정부가 최대의 실력자인 듯 보이지만 스스로 코가 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관련 부처일수록 추진한 일이 꼬일 때에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가기 마련이다.
석유 위탁판매와 석유정제를 유공이 완강히 거절하자 호남정유는 정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정부는 자신이 선정한 사업자임으로 조정과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결국 유공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호남정유가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다.
배럴당 2~3달러 하는 원유의 가공료를 70%나 요구하는 등 엄청나게 비싼 요금을 유공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남정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통망이 없는 호남정유로서는 유통망을 확보할 때까지 지불해야 할 수업료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석유사업의 업의 개념에 대한 재탐침 작업이었다. 석유사업이 돈이 된다는 얘기는 단순히 정유 사업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원유도입권·정유권·원유수송권 등이 더 이익 날만한 사업들이었다. 개별적으로도 엄청난 이권인데, 이들을 한데 묶는다면? 당연히 본업보다 훨씬 더 큰 사업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판단이 서자 럭키는 칼텍스와의 협력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어떤 명분을 들이대더라도 돈을 더 벌고, 시장을 석권하려는 비즈니스 세계의 생리 그 자체였다.
칼텍스에 대한 선제공격은 럭키 측에서 먼저 시작했다. 구평회는 원유수송권에 도전키로 하고 원유수송을 전담할 호남탱커회사 설립을 공개했다. 그러나 칼텍스는 알짜 사업을 합작사의 몫으로 하지 않고 빼내려는 럭키 측의 시도를 알고 반대했다. 하지만 럭키는 이미 정부가 수출입 물량에 대한 국적선 확충 계획을 갖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정부의 측면 지원을 유도한 가운데 1년간 지루하고 긴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 업체를 억지로 다루다가는 자칫하다 한·미 양국 간의 갈등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얻어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원유수송권을 얻으려 했으나, 타결 방식을 달리해 단 3척의 탱커로 럭키 측이 원유를 수송한다는 합의점을 찾았다.
원래 합작 조건에는 원유수송은 칼텍스 측이 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영참여권에는 원유공급권, 비토권 등 중요한 권한을 몽땅 칼텍스 측이 쥐고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구평회는 한국 국적 유조선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도록 1971년 수송전담 회사인 호남탱커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끈질기게 원유수송 분야를 파고들어 마침내 1987년경에는 수입원유 수송의 89%를 호남탱커가 맡게 됐다.
결국 몇 차례 협상 끝에 칼텍스의 원유수송 업무는 모두 럭키 측으로 넘어 오게 됐다. 럭키는 칼텍스와 합작을 하면서 운도 크게 따랐다. 칼텍스의 원유공급원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안정적인 원유공급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LG그룹은 1984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합작으로 자본금 1억 2600만 달러의 플라스틱 공장 NPC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해외투자에도 나섰다. 오랜 공정을 거쳐 1987년에 본격 가동된 NPC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VCM과 PVC 레진 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해외투자의 노하우 및 기술축적 그리고 석유화학 제품의 수출증대를 가져왔다.
칼텍스가 맺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십분 이용해 자체 활로를 뚫은 셈이다. 이 공장의 PVC레진 설비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금성사의 美공장 진출
제5공화국이 출범한 1980년 12월 럭키그룹 회장실에서는 구씨·허씨 7인 운영회 사람들이 모여 해외 사업과 관련해 마지막 격론을 펼쳤다. 그들의 면면은 회장 구자경과 구태회·평회·두회·자학, 허준구·신구 등 구씨·허씨 양 집안을 일컫는 이른바 ‘럭키 브라더스’와 이헌조 기획 조정실장이었다.
이미 3년 전부터 금성사의 미국 공장 진출을 설계하고 준비해 왔지만 막상 최종 결정에 이르자 서로간의 이견 차가 극심했다. 비록 미국 진출과 관련해 격론이 오갔지만 결론은 그간 준비해온 대로 ‘추진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것이 그룹의 면모를 바꾸는 길이기도 했고, 정부 정책에 협력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럭키의 미래를 생각할 때, 1990년대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놓는 길이기도 했다.
허신구는 7인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새해가 밝자 방미 길에 올랐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지는 전자 쇼에 참가하는 국내 전자업체 대표단들이었다.
“일단 한번 가서 본 후, 북미 시장을 장악할 구상을 해 보자” 일단 둘러본 뒤 전략을 짜보자는 구상이었다.
금성사 미국 생산법인(GSAI) 진출은 현지 판매법인(GSEI)이 자리를 잡았다지만 전혀 녹록지 않았다. 경쟁의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컬러 TV가 연간 1200만대나 팔리는 황금 시장이었지만 한국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겨우 4% 내외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시장 잠재성이 무궁무진했다.
‘현지에서 생산한 골드스타 제품을 들고 시장에 밀어 닥친다?’ 허신구의 머릿속에는 30년 전 락희화학 시절 서울 을지로 4가 고물상 ‘만물상회’ 2층에 위치했던 락희가 떠올랐다.
‘그때 국산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비자들을 보며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반드시 국산으로 시장을 석권하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자체 상표를 붙여 진출하는 명실상부한 골드스타의 진출 아니던가!’
허신구는 그간 금성사가 만든 제품이면서도 제니스, RCA 등 주문자표시부착상표 방식으로 수출해야만 했던 북미 시장에서의 종속적 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는 점을 절감했다. 자체 상표를 강화하기 위해 심지어는 골드스타 상표가 붙은 제품을 수입해 가는 바이어에게는 1~2%의 할인율을 적용해 주기도 했었다. ‘내 상품으로 남의 장사 치다꺼리를 하는 게 무슨 사업인가?’ 이제는 그런 절름발이식 사업에서 탈피하고도 싶었다.
허신구는 서울에 있는 이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허씨 가문이 당당히 일궈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자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동업이란 어느 한쪽의 역량이나 역할이 기울면 곧 뒷말이 나오게끔 되어 있다. 안살림 묶기라는 허씨 집안의 역할이 실은 바깥 묶기에 더 적합하다는 평을 듣고 싶었다. 그는 북미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크고 야심차며 대담한 계획을 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구씨이야기·허씨이야기, 전경일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