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중반인데…“권력누수 막 올랐다”

2005-05-24     홍성철 
‘레임덕인가.권력 심장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노무현 대통령 측근 인사들로 향하고,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내부조사 파문으로 권력 이너서클 내부의 파워게임 조짐도 감지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을 보도하고 있으며, 현정권 탄생의 주역인 ‘노사모’ 내부에 이상기류도 감지되고 있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강금원씨와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된 경제인 사면 이후 참여정부의 개혁성과 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노 대통령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인 열린우리당도 4·30 재보선 전패 이후 전의를 상실한 분위기다. 그야말로 현정권의 기반이 사면초가에 빠져있는 형국이다. 여권 일각에서조차 ‘조기 레임덕(권력 누수)’을 우려하고 있을 정도다.현 정권의 레임덕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과 관련한 이른바 ‘오일게이트’는 조기 레임덕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검찰의 수사 칼날이 노 대통령의 오른팔인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과 노 대통령 후원회장을 지낸 이기명(현 이광재 의원 후원회장)씨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검찰은 조만간 이 의원을 소환 조사한 후 혐의가 드러날 경우 사법처리도 불사한다는 방침이고, 이씨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오일게이트의 핵심 인물로 지목받고 있는 코리아크루드오일 허문석 대표와 이씨가 고교 동창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허씨의 행적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실제로 허씨는 지난 4월4일 감사원 조사 이후 인도네시아로 출국하기 직전에 이씨와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이씨는 “허씨와 전화 통화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전사업과 관련한 논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검찰 수사 대통령 측근 겨냥

오일게이트의 또다른 핵심 인물인 전대월(구속)씨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지난해 6월 이광재 의원의 소개로 허씨를 처음 만난 곳은 이기명씨 사무실”이라고 주장했던 것도 이씨의 연루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검찰은 이씨가 허씨의 출국 과정에 개입했는지 여부 등 이씨의 연루 정황을 확보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이처럼 검찰의 칼날이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의원과 이씨)을 정조준하자 여권은 바짝 긴장하며 검찰의 수사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의원은 현 정권 2인자로 통할 만큼 노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고, 이씨 또한 노 대통령이 ‘선생님’으로 호칭할 만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연루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적지않은 도덕적 상처와 정치적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DJ(김대중 전대통령) 정부가 이른바 ‘옷로비 사건’으로 인해 도덕적·정치적 타격을 받고 정국주도권을 상실, 조기 레임덕을 부추겼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 분위기다. ‘오일게이트’가 ‘제2의 옷로비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이 의원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여권 일각의 목소리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그러나 이 과정에 이 의원의 오른손 검지를 절단한 부분이 터져 현정권의 주축인 386 인사 전체에 대한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특히 이 문제는 그가 군면제를 위해 자해한 것이라는 쪽으로 의혹이 비화되면서 국민적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자칫 이 문제는 현정권 전체에 상처를 입힐 가능성마저 있다.최근 밝혀진 NSC 내부조사 파문도 레임덕 징후로 분석되고 있다.

NSC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노 대통령 지시로 지난달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자체 조사를 벌였다. 청와대측은 ‘내부 조사’라는 언론 보도 대신 ‘점검 회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내부 조사 파문이 심상치 않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특히 내부 조사를 받는 당사자가 노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이종석 NSC 사무차장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NSC 내부 조사에는 정 장관과 문재인 민정수석, 천호선 국정상황실장이 참석해 이 차장을 상대로 질문하고 답변을 받는 청문 형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차례의 회의 결과 “협상에 문제가 없었다”고 결론은 났지만 청와대 외교안보라인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는게 아니냐는 등 갖가지 억측이 나돌고 있다.

일각에서는 권력 이너서클을 둘러싼 청와대 인사들간의 파워게임으로 해석하고 있다.실제로 NSC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 차장은 그동안 청와대 내부 세력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견제를 받아왔다. 노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고 이 차장이 관련 부처와의 조율 과정 등에서 독주하고 있다는 지적이 여러번 제기됐던 것. 이번 자체 조사도 민정수석실과 국정상황실의 문제 제기가 발단이 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문 수석과 천 실장이 앞장서 독주하고 있는 이 차장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던진게 아니냐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차장이 차기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 등 외교안보라인 최고위직 후보자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력 이너서클 파워게임

여권내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정 장관 입장에서는 이 차장의 독주는 자신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차장 압박에 가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노 대통령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인 열린우리당이 재보선 전패 이후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는 현실도 레임덕을 부추기고 있다.‘0 대 23’이라는 초라한 재보선 성적표는 열린우리당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당 관계자들은 ‘오일게이트’ 등 권력형 비리 의혹을 재보선 전패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문희상 의장 등 당 지도부의 지도력과 리더십 부재를 문제삼고 있는 분위기다.재보선 참패 이후 당 지도부가 선거구를 돌며 민심 추스르기에 나섰지만 여권에 등 돌린 민심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당 주변에서는 “지도부가 이미 레임덕에 접어든 게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의를 상실한 지도부와 무기력증에 빠진 당직자들이 더욱 경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침체국면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다. 당장 오는 10월 재보선이 예정돼 있고, 내년 6월에는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 침체된 분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또다시 참패의 수모를 감내해야 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차기 대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우려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관성 때문이다.실제로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지난 4·2 전대 과정에서 측근 인사들을 당 지도부에 입성시키기 위해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노 대통령의 당권장악 플랜과 맞물려 ‘노심(盧心)’ 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결과론이지만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문 의장과 염동연 상임중앙위원이 각각 1, 2위로 당선, 사실상 친노세력이 당권을 장악한 것은 노 대통령의 집권중후반 권력구도 플랜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집권당 무기력증 심각

하지만 문 의장을 정점으로 한 새 지도부는 재보선 전패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국주도권도 사실상 야권에 넘겨줘 ‘집권 여당’이 무색할 정도로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집권중후반 국정운영 구상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아닌 조기 레임덕을 부추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는게 열린우리당의 현주소다.반대 여론을 뒤로한 채 단행한 5·15 특별사면으로 인해 참여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도덕성과 개혁성은 이제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됐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사면복권 대상에 불법대선자금 사건 관련자 등 경제인 31명에 노 대통령 측근인 강금원씨가 포함된 사실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여기에 이번 특사는 정대철·이상수 전의원, 안희정씨 등 대선공신들을 사면(8·15 광복절)하기 위한 정지작업 성격이 짙다는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면서 노 대통령의 개혁 의지가 꺾인게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 식구 챙기기’ ‘선심성 사면’ 등 집권말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이 현 정부 중반기에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이 노무현 정부의 조기 레임덕을 우려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대 정권 집권중반부 레임덕 초래한 사건들

친인척·측근 비리가 권력 수명 단축노태우=3당합당, YS=김현철 비디오사건, DJ=옷로비이승만 박정희 절대권력 향유, 노무현= 오일게이트(?) 과거 정권에서도 레임덕 현상은 어김없이 존재했다. 임기 말 대통령의 권력누수 현상을 뜻하는 ‘레임덕’은 ‘절름발이 오리’란 뜻의 ‘lame duck’에서 유래했다.레임덕은 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인 만큼 절대권력자였던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임기’ 라는 개념이 없어 레임덕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재임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도 레임덕 없이 임기를 마쳤다. 88년 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우리 정치권에도 ‘레임덕’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노태우 정권시절에는 90년 3당합당이 레임덕의 단초가 됐다.

3당합당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민자당을 창당한 당시 김영삼(YS) 대표최고위원은 그 순간부터 끊임없는 당내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92년 YS가 민자당 대권후보로 결정된 이후에는 사실상 모든 권력과 인맥들이 YS에게 몰렸다.이처럼 레임덕의 최대 수혜자였던 YS는 자신이 집권하던 97년 레임덕 부메랑에 시달려야 했다. 소통령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차남 현철씨의 비리사건이 터지면서 YS정권은 쇄락의 길을 걷게됐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해 권력을 독점한 사람이 바로 이회창 전한나라당 총재다. 김대중(DJ) 정권도 레임덕에 자유롭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99년 초 발생한 이른바 ‘옷로비 사건’. 검찰총장 부인 등 고관집 부인들의 옷값 대납 소문에서 출발한 이 사건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축소 은폐의혹이 제기되면서 헌정사상 최초로 특검제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DJ는 이 사건 이후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조기 레임덕 징후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두 아들이 비리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레임덕은 절정에 달했다.집권 중반기에 접어든 노무현 정권도 서서히 레임덕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핵심측근인 이광재 의원과 이기명씨가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오일게이트’가 현 정권의 조기 레임덕을 초래할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