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10·26 서울, 대한민국 바꾸다
총으로 종식시킨 유신독재 투표로 무너뜨린 한국정치
2011-10-31 조기성 기자
한나라-민주 모두 타격…박근혜-손학규 치명타
40대 이하 분노 폭발로 박원순 서울시장 탄생
대한민국은 10월 26일과 특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31세 청년 안중근이 먼 이국 땅 하얼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의 총알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유신독재의 종말을 고하게 됐다. 이로부터 다시 32년이 지난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민들은 무소속 박원순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기성정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 기존 대권주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10월 26일, 수도 서울이 시민사회세력의 품에 안기면서 한나라당의 정권재창출보다 범야권 진영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커졌다. 대한민국 전체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탄생하면서 기존 정치 지형이 통째로 뒤바뀌고 있다. 정당정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아름다운 양보로 범야권의 서울시장 후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박 후보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과의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한 데 이어 본선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제압했다. 정치권에 발을 디딘 지 50일 남짓밖에 안 된 박 시장이 신민당(1961년 창당)과 공화당(1963년 창당)의 맥을 일부 잇고 있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후보를 차례로 누름에 따라 정당정치는 위기에 몰렸다.
이 때문에 기존 아날로그식 정당체제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정당 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퇴출 경고장”이라며 “기성 정치권에 대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먼저 야권에서는 ‘안철수 바람’의 위력이 이번 선거를 통해 다시 확인됨에 따라 민주당의 대안 세력, 즉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세력과 친노무현 세력의 영향력이 커질 전망이다. 이들 세력은 내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범야권을 대통합하자”며 민주당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그야말로 격랑에 휩싸였다. 국정 장악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면서 내년 총선과 대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에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총선 필패론이 확산되면서 한나라당발 정계개편 바람이 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 속에 변화와 쇄신 요구가 터져 나오면서 홍준표 대표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나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세론도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 과정에서 ‘내곡동 사저’ 문제가 불거져 나 후보에게 큰 악재로 작용한 만큼 이 대통령에 대한 당의 불만이 커지면서 당이 이 대통령과의 거리 두기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홍사덕 의원 등 일부 친박 의원들은 이번 선거의 패인을 이 대통령이라고 지목하면서 탈당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권 일각에선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의 청와대 비서진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세대 간 대결 양상…
40대 이하 분노 표출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 박 시장이 9.2%p라는 큰 격차로 승리한 데에는 20~40대 젊은 층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다. 박 후보는 20대, 30대, 40대에서 각각 69.3%, 75.8%, 66.8%의 지지율을 얻었다. 박 시장은 나 후보에 비해 20, 40대에서 2배가량, 30대에선 3배가량이나 많은 지지를 얻은 셈이다. 반면 나 후보는 60대 이상에선 두 배 이상, 50대에서도 10%p 이상 박 당선자를 앞서 서울시장 선거가 세대별 대결 양상을 보인 것으로 분석됐다.
통상 젊은층은 진보·야권 성향이 강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과반을 훨씬 넘는 수준으로 ‘표쏠림’ 현상이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특히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청년실업, 정치 불신 등 각종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젊은층의 불만이 높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영·호남 간 지역 대결과 색깔 논쟁이란 이념적 대결에 고착돼 있던 정치 구도가 경제위기와 양극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청년층과 중장년 간 세대 대립, 부자와 서민층 간 계층 대결 구도로 진화되면서 대한민국에 새로운 갈등 전선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시장 선거는
차기 대선 가늠자
서울시장 선거는 다음 대선의 향배를 알아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1995년 첫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당후보였던 조순 후보가 당선, 그 여세를 몰아 1997년 12월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2006년 제3회 지방선거에서는 오세훈 후보가 당선되면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했다. 오 전 시장이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권재창출의 흐름으로 가는 듯 했지만, ‘무상급식 주민투표’ 후폭풍으로 사퇴, 결국 야권에 서울시장 자리를 내주면서 내년 대선 정국을 안갯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차기 대선후보들 모두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명암이 엇갈렸다.
박근혜, 대권가도 빨간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서 당의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의 대권가도에도 일단 빨간불이 켜졌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패하기는 했지만 이후 2012년 대선과 관련해 한 차례도 위협받지 않았던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이 이번 선거를 계기로 휘청거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 전 대표는 전국 규모로 치러진 이번 재보선에서 공식 선거운동기간 13일 중 8일을 서울에 할애하며 적극 지원에 나섰다. 전국 42개 선거구에서 치러진 이번 재보선에서 지원유세의 시작과 끝을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와 같이 하며 서울시장 선거에 가장 공을 들였다.
박 전 대표는 당초 소극적인 지원에 나설 것이란 정치권의 예상과 달리 수도 서울의 상징성을 감안,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한 수도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 총력전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박원순 야권단일후보가 승리하면서 박 전 대표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선거의 여왕’이 총력전에 나섰지만 패배했다는 점에서 향후 대권행보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박 전 대표가 지켜온 대세론이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과거 박근혜 대세론이 여야를 통틀어 전체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안철수라는 야권 대안의 출현으로 여권 내 ‘작은 대세론’ 차원으로 축소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윤 실장은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던 위력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듣게 됐다”며 “붕괴된 친이계가 일정 부분 다시 결집하는 한편, 이들이 보수쪽의 새로운 외부세력과 연대 움직임을 보이면서 여권을 재편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손학규, 당 내외서 공격 받아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서울시장 선거에 제1야당인 민주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는 당내 질책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크다. 지난 경선에서 박 시장을 당에 영입하려다 당내 경선에 소홀했다는 지적, 박영선 의원을 당 대표주자로 뽑아 통합경선장에 내보내긴 했지만 결국 패배해 ‘불임정당’이란 오명을 받은 책임을 손 대표가 피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선거 다음날인 10월 27일, 당내 비주류 의원 모임인 ‘쇄신연대’ 소속 의원은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당을 쇄신해야 하고, 전당대회를 조속히 준비하자”고 손 대표 조기사퇴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손 대표는 박 시장의 선거 과정에서 이뤄진 야권단일화를 발판 삼아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온 야권대통합을 성사시켜 그동안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과 우려를 불식시킬 계획이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그로서는 새로운 인물을 당에 적극 영입하고 호남색을 뺀 민주당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야권대통합이 성사되면 끊임없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당내 비주류 진영을 넘어서고 민주당의 좌장에서 범야권을 아우르는 지도자 반열에 오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 대표의 목표인 야권대통합이 순항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야권대통합의 상대인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난색을 표하기 때문이다.
야권대통합의 주도권도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표로 있는 ‘혁신과 통합’과 겨뤄야 할 상황에 처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구성된 혁신과 통합에는 문 이사장을 비롯해 대중 인지도가 높은 이해찬 전 국무총리,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 김두관 경남지사가 상임공동대표로 포진해 있고 한명숙 전 국무총리,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고문 및 자문단으로 활동한다. 혁신과 통합은 지난달 10일 “11월까지 범야권 통합정당 추진방안을 확정하자”고 공식적으로 범야권에 제안한 바 있다. 손 대표는 야권대통합 주도권을 놓고 ‘혁신과 통합’과의 일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소통과 통합’의
새 리더십 원한다
결국 서울시민들은 10월 26일 투표용지를 페이퍼스톤(종이돌)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존 정치권을 향해 힘차게 던진 것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5세 훈이’라 불리는 오세훈 전 시장의 아집에서 비롯된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로인해 치러진 이번 보선 결과를 두고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지난 4·27 재보선 참패, 그리고 뚜껑도 열지 못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나타난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심과 소통하지 않는 ‘불통’ 한나라당에 대한 40대 이하 젊은층의 분노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물론 검찰과 경찰, 선거관리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까지 선거 과정에서 SNS를 통한 ‘참여정치’를 막는 데에만 급급했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야 SNS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당을 조금 바꾼다고 해서 돌아선 민심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나경원 후보 선대위의 SNS 특보 역할을 했던 이학만 부대변인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외부 인력 수혈도 방편이긴 하지만 시기적으로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10월 26일 민심의 요구와 다른 선거 전략을 편 ‘구태정치’ 한나라당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이뤄졌다. 나 후보 측의 네거티브 선거전에 서울시민들은 등을 돌렸고, 색깔론까지 더해지면서 젊은층의 반발은 더욱 심해졌다. 원희룡 최고위원이 “상대비방이라든지, 시대착오적인 이념규정이라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 젊은 세대에게 구정치의 전형으로 비쳐지지 않았나 자성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서울시민이 표로 보여준 진실은 대한민국 정치가 소통과 통합의 장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이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