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 전 문경시장 자서전 2

2012-11-01     신현국 전 문경시장

4. 3D 업종

- L팀장 : 어느 신문에서 시장·군수를 3D 업종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 신 : 쉽지않은 자리지요. 결코 간단한 자리도 아니고요. 관선 때처럼 폼 잡는 자리는 더욱 아니고요. 24시간 촘촘히 짜여진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연극배우지요. 모두가 유권자입니다. 유권자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상전이라는 뜻이지요. 심지어 시청의 공무원들조차 직장 내에서는 부하 직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유권자요, 상전입니다.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상대방 측에서 유언비어로 퍼뜨린 이야기 중에 시장하면서 예산의 1%만 먹어도 그것이 얼마냐, 문경시 1년 예산이 5000억 원이니 1%면 50억 원입니다. 시장 5년 6개월 했으니 도대체 얼마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모르는 시민들은 믿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산의 집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격합니까. 2000만 원 이상은 모두가 공개 입찰에 붙여지고 2000만 원 이하짜리 수의 계약조차 모든 자격 요건 다 갖춘 업체에게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계약하지 않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공무원 승진할 때 공짜로 해주겠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장·군수 하는 사람들 나름대로 자존심도 있고, 또 갖출 것 갖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없다고 부하 직원한테 돈 받는 사람 없다고 봅니다. 또 그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가 붕괴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도 수 없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S씨 사건으로 검찰·경찰 조사를 샅샅이 받으면서 그런 소문들이 헛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지요. 지금의 시장·군수는 정말 보기에 따라 3D 업종입니다. 일은 24시간도 부족할 만큼 많고요. 얽히고설킨 일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지요. 선거 도운 분들 인사 청탁, 공사부탁 하는 데도 다 들어드리지도 못합니다. 낮에는 일로 정신이 없고, 저녁에는 길·흉사·모임 때문에 늦게까지 쫓아다녀야 하고 주말에는 행사 때문에 또 쉴 수 없지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집사람도 개인생활 반납해야 되지요. 금전적으로도 5년 6개월 동안 훨씬 마이너스 였습니다.

- L팀장 : 10가지 잘해도 1가지 잘못하면 온통 아우성이지요.

▲ 신 : 그렇습니다. 10가지 아니 99가지 잘해도 1가지 잘못하면 잘한 일은 없고 1가지 잘못한 일로 비난을 받고 욕을 먹고, 감사 받고, 검찰·경찰 조사를 받지요. 설사 잘못하지 아니해도 내게 불리하거나 손해를 보는 일은 모든 책임이 저에게 돌아오지요. 그런데 더욱 억울한 것은 힘들게 어렵게 고군분투하고 지역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인데, 우선 겉으로 나타난 작은 문제점만 침소봉대하여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것이지요.

“박정희 대통령 때 경부고속도로도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만들 때도 반대가 있었지요”
이렇게 위로해 주는 분들이 있어서 위안을 삼지요.


제 2장 문경시장의 꿈 

·23년 간 몸담은 환경부, 자타가 공인하는 환경 전문가, 박사, 기술자, 교수로서 해야 할 일 많은데…
·환경부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고위관료…
·남은 인생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 문경을 위해 몸을 던지겠다고 아무대책 없이 그냥 문경으로 뛰어 내렸지요.

1. 23년간 몸 담았던 환경부를 떠나다

- L팀장 : 2001년 9월 환경부를 그만두셨지요. 당시 환경부 공보관으로서 김명자 장관의 핵심 참모로 더욱 크게 할 일도 많으셨을 텐데, 그 좋은 자리를 그만두고 인구 8만도 안 되는 고향시장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환경부에 계시면 실장, 차관까지는 무난히 승진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지방의 선거라는 것이 중앙부처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다(정치라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돈도 필요하고 지역의 연고가 있어야 할 텐데…

▲ 신 :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어요. 제 마음만 믿고 제 생각만 하고, 아무런 보장도 없이 그냥 문경시장 출마하겠다고 23년간 몸 담았던 중앙부처의 국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요. 당시 장 ·차관을 포함하여 저의 많은 지인들이 저의 사직을 만류하였지요.

- L팀장 : 그 때가 지방선거를 9개월 앞 둔 시점이었습니다. 한나라당 공천에 대한 언질은 받았던가요.

▲ 신 : 전혀 아닙니다. 저는 고향 발전에 대한 청사진이 있었고, 제가 나서면 시민들이 저의 순수한 뜻을 받아들여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제가 1998년 국장으로 진급하면서 첫 발령지가 대구지방환경청장이었지요. 대구로 와서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경을 자주 들르게 되었고, 고향의 아픔을, 어려움을 피부로 느꼈지요.
고향의 인구가 반으로 줄어들고 시내상권이 무너지고, 농촌이 살기 힘든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동안 닦은 인맥 능력을 총 동원하여 고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출마하게 된 동기였지요.

- L팀장 : 초등학교만 고향에서 나오고 중·고·대학을 모두 객지에서 다녔고 외가·처가 쪽도 문경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 신 : 그렇습니다. 모든 게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조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23년간 몸담고 사무관에서 출발하여 이사관까지 거치고 관리관 (1급) 승진하면서 명예퇴직을 했지요. 당시 저의 나이 49세로 향후 10년은 공직에 머무를 수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보장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기분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제게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고향 문경을 멋지게 발전시키겠다는 포부가 제가 용감하게 만들었지요.

2. 아버지의 꿈

- L팀장 :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문경시장이 되라고 하셨다면서요.

▲ 신 : 그렇습니다. 제가 공무원 할 때 늘 문경군수가 좋지, 공무원하려면 문경군수는 해야지. 아버지가 아시는 공무원은 문경군수가 제일 높은 자리요, 제일 좋은 자리였습니다. 가난한 농부로 태어나 농사일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농사짓고 사시다 보면 무식하다고 그것도 모른다고 무시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옛날 공무원들은 아버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었고, 높은 산이었지요. 당신이 당한 설움, 한(恨)을 아들에게서 찾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2006년 선거에서 당선된 후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다고 신고 드리고 많이 울었습니다. 늘 문경시장 하라고 말씀하신 게 저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잠재되어 아버지의 꿈은 결국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 문경시장 당선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꿈 이루었습니다”


제 3장 시련의 세월

·호사다마인가, 5년 6개월의 문경시장 하면서 크고 작은 시련의 장벽이 몰려왔지요…
·4번의 선거를 치루면서 2번의 선거 실패, 파파라치,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되어 대법원까지 치열한 재판…
·2010년 선거를 앞두고 가택압수수색, 구속영장 청구까지…

1. 첫 번째 시련

- L팀장 : 2002년 문경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무소속 후보에게 1300표 차로 낙선했지요.
▲ 신 : 그렇습니다. 운 좋게 공천을 받았지요. 그런데 대구·경북에서 부지깽이도 공천만 받으면 당선된다는 대구·경북에서 낙선을 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공천 받았으니 여론조사 결과도 좋고 하여 낙관하였지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저를 패배하게 했지요. 막판에 선거가 역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선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사람은 학교 출근을 했고 저 혼자였습니다. 일단 갈 데가 없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오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데 저의 세상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환경부도 그만두었고 어제까지 시장된다고 생각했는데…. 오후가 되어 라면 하나 끓여 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차를 탔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어디로 갈까 망설였지요. 일단 선거 사무실로 갔습니다. 선거 사무장과 회계책임자가 커피를 타줘 커피를 한잔 마셨습니다. 한 30분 얘기 나누었지만 그곳도 제가 있을 곳이 못 되었지요. 다시 핸들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고향집으로 핸들을 돌렸지요.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해보니 어머니 볼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