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보선, 오세훈 노림수

차차기 대선 행보 순항 중

2011-10-10     조기성 기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노림수였던 것 같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은 싸움에서 빠져 자신만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 서울 지역 의원의 말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부결에 이은 시장직 사퇴, 서울시장 보선이 차기 대선이 아닌 차차기 대선을 위해 오 전 시장이 계획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이 의원은 “한나라당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면서 정권을 되찾아왔던 것처럼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 야권에서는 또 다른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맹공이 들어올 것을 오 전 시장이 예견했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덧붙였다. 오 전 시장이 예측했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오 전 시장은 자신의 시장직 사퇴로 인해 촉발된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렸다. ‘안철수 태풍’이 정국을 강타해 차기 대권 프레임을 일순간에 바꿔버렸지만 오 전 시장은 정치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상태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안 해도 될 선거를 치르면서 고전하고 있고, 민주당 역시 후보도 못 낸 ‘불임정당’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박원순 후보가 입당을 안 해도 민주당 후보”라고 위안을 삼는 웃지 못 할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정몽준-김문수-손학규-문재인 타격
“한나라-박근혜 곤란한 처지에 빠뜨려” 비판도


오 전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띄우기 전인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여권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김문수 경기지사와 함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이어 2위를 다퉜다. 박 전 대표가 대세론을 형성하며 30%대의 높은 지지율을 꾸준히 이어간 반면 오 전 시장의 지지율은 4~5%로 미미했다.

오 전 시장은 표면적으로 박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지난 8월 12일 ‘차기 대선 불출마’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차차기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는 모양새가 됐다.

오 전 시장의 차기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는 곧바로 8월 셋째 주부터 오 전 시장을 차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에 포함시켰다.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호칭을 얻은 오 전 시장은 15.5%의 지지율을 얻어 줄곧 선두를 달리던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밀어내고 단숨에 1위를 차지했다. ‘안 될 싸움’(차기)에서 ‘될 만한 싸움’(차차기)으로 전쟁터를 바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후 같은 기관의 여론조사에서 14-15%의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타 후보군을 10%p 가까운 차이로 제치며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안철수 태풍 진앙지

오 전 시장의 시장직 사퇴로 인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 ‘정당정치의 위기’를 초래하면서 등장한 안철수 원장과 박원순 변호사는 차기 대통령과 차기 서울시장에 근접해있는 상황이다.

지난 4년간 철옹성처럼 유지됐던 ‘박근혜 대세론’이 ‘안철수 태풍’에 흔들거렸고,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다.
안 원장이 박원순 후보 지지를 지지하면서 서울시장 불출마 선언을 한 지 한 달이 지났고, 정치적 행보도 전무했지만 ‘안철수 태풍’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3~4일 실시한 SBS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원장은 박 전 대표와의 양자대결을 가정한 여론조사에서 40.4%를 얻어 36.1%를 얻은 박 전 대표를 눌렀다.

‘안철수 태풍’을 이어 받은 박원순 후보는 제1야당인 민주당의 조직을 이겨내고 야권 통합 후보가 됐다. 박 후보는 현재 각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에 우세를 보이고 있다. 박 후보가 승리할 경우 내년 총선은 물론 대선에서 제2, 제3의 ‘안철수 태풍’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박 전 대표가 나 후보의 선거 지원을 천명하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재검증받게 됐다. 이미 대세론이 무너진 상황인데다, 4년 만에 ‘당 지도부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소신을 깨고 직접 지원에 나서는 만큼, 나 후보가 패배할 경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친박계 한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오세훈 시장의 ‘정치도박’이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까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다”면서 “안 해도 될 선거를, 질 것을 뻔히 아는 선거에 박 전 대표가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오 전 시장이 정말 야속하다”고 성토했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도 “오세훈이 호국의 물귀신이 되어 박근혜마저 도박판에 끌어들인 셈”이라며 오 전 시장을 맹비난했다.

다른 여권 대선주자들 역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국민들의 관심도가 더욱 떨어진 점이 고민이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는 사재 2500억 원 출연과 자서전 출판기념회 등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을 만하던 차에 불어 닥친 ‘안풍’이 야속하기만 한 상황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대권행보에 대한 질의가 쏟아졌지만 올해 국정감사에선 대권에 관한 질의는 전무했다.

‘1강’ 안철수
‘2중’ 문재인-손학규 구도


야권 대선주자들이 입은 타격은 더욱 크다. 오 전 시장이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안철수 원장으로 인해 기존의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 대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야권 구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손 대표는 안 원장과 합리적 중도 이미지가 겹치는 손 대표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다.

지난 4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주간정례 여론조사 결과 손 대표는 5.5%의 지지율을 얻어 4위에 그쳤다. 박근혜 전 대표가 27.4%로 1위 자리를 지켰고, 안철수 원장은 18.0%로 2위, 3위는 문재인 이사장(8.8%)이 차지했다. SBS-TNS코리아의 차기대선 예상지지도 여론조사결과에서도 박근혜(26.7%)-안철수(15.0%)-문재인(7.2%)-손학규(3.4%) 순으로 나타났다. [아시아투데이]가 리얼미터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 31.8%, 안철수 18.1%, 문재인 9.5%, 김문수 6.0%, 김두관 5.5%, 손학규 5.3% 순이었다.

4·27 분당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15% 가까운 지지율을 얻었던 당시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더구나 야권의 대선주자 1, 2위를 제1야당인 민주당이 아닌 비정치권 인사인 안철수 원장, 문재인 이사장이 차지하면서 민주당은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손 대표와 함께 ‘빅3’로 꼽혔던 정동영, 정세균 최고위원은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종종 이름이 빠지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10.26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경선에서도 안철수 열풍을 이은 박원순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를 누르면서 민주당이 입은 상처는 더욱 깊어진 상태다.

손학규 대표가 야권 통합 후보 경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의 뜻을 밝혔다가 의원들의 반대로 철회하는 일종의 재신임 과정을 거치면서 지도력의 위기를 극복하긴 했지만, 이후 민주당의 상처는 불가피하다.

문 이사장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문 이사장은 지난 8월에만 해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손 대표를 누르며 야권 대선주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서울시장 보선으로 정치권에 ‘안철수, 박원순’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PK(부산·경남)지역이 기반인 문 이사장은 10·26 재보선에서 서울시장 선거가 없었다면 최대 관심 지역으로 꼽혔던 부산 동구청장 선거가 묻힌 것도 악재다.

오세훈의 저주(?)

1년 2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판을 흔들고 있는 현 상황을 일각에서는 ‘오세훈의 저주’라고 표현한다. 여야 대선주자들을 비롯한 정치권 전체가 오 전 시장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오 전 시장은 내년에 미국 스탠퍼드대학으로 연수를 떠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