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차일혁 총경, 경무관으로 특진
빨치산 토벌대장 53년 만에 돌아온 계급장
2011-06-28 윤지환 기자
남부군 이현상 사살하고도 동료 위해 훈장포기
적 시신 화장해 자신의 철모에 넣고 M1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려
정치적인 이유로 묻혔던 차 총경의 공로 뒤늦게 치하, 그 부하들도 특진
[윤지환 기자] = 경찰청은 총경이던 고(故) 차일혁 경무관을 경무관으로 추서하겠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차 경무관의 공적이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인정된 것이다. 6·25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하거나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경찰관 709명도 한 계급씩 특진시키기로 했다. 특히 차 경무관의 추서는 53년 만에 이뤄진 것이어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가장 큰 영예다. 단일전투로서는 최다인 세 개의 태극무공훈장이 한꺼번에 수여된 적이 있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사살 공로였다. 첫 번째 훈장은 내무부 장관이, 두 번째 훈장은 치안국장, 세 번째는 현지사령관이 받았다. 토벌대 제2연대장으로 1953년 9월 반야봉 근방 빗점골 전투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우고 시신을 찾아낸 차 경무관은 훈장 수훈에서 빠져있었다. 훗날 태극무공훈장에 비해 급이 낮은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고 부대원들의 1계급 특진과 대통령 부대 표창장을 받긴 했지만 그 경위는 뒷 맛이 개운치 않았다.
자유당 정권 시절 총경은 몇 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위로는 경무관과 치안국장, 두 계급이 있었다. 비교하자면 총경은 지금의 치안감이며 치안국장은 치안총수, 경무관은 각 지방 경찰청장급이다. 당시 경무관은 경찰관의 꽃으로 불렸다. 군 계급 구조로 보면 사단장에 준한다.
그러나 차 경무관은 계급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총경 시절 차 경무관은 한계급만 특진되면 경무관이 되는데도 경무관 승진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당시 차 경무관은 작전명령을 어겨 불명예퇴진을 당할 위기에 처한 동료 김동진 경감의 총경 승진을 조건으로 훈장을 고사했다.
또한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의 장례도 문제가 되었다. 방부처리 돼 20일간 처참한 몰골로 창경원에 전시됐던 이현상의 시신은 일가친척도 찾아가지 않았다. 이현상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살되거나 월북, 혹은 개명해 숨어살아야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인간을 사랑한 차 경무관
그 살벌한 시국에 차 경무관은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찾아 나섰고 그렇게 수습한 시신을 화장해 자신의 철모에 넣고 M1소총으로 빻아 예를 다해 섬진강에 뿌렸다. 이는 진영과 사상을 떠나 ‘인간에 대한 연민’, 즉 인간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갖추고자 했던 차 경무관에게 이는 독화살이 돼 돌아왔다. 정치적으로 그는 여론의 도마에 올라야 했고 빨치산 토벌작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도 그 전공은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후에 명예회복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4년 국가치안분야에서 유공자로 차 경무관이 선발되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차 경무관을 위한 비석을 세우라고 차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 회장(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 대표)에게 하사금이 전달되기도 했다.
98년 구례 화엄사에도 차 경무관 공적비가 세워졌다. 그 내막은 이렇다.
51년 빨치산 토벌작전 중 남부군 근거지인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무의 명령이 떨어지자 차 경무관은 “절을 불태우는 건 한 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는 천년 세월도 부족하지 않은가”라며, 지리산 각황전 문짝만 뜯어내 불태우고는 “전각 문짝을 태우는 것도 절을 태운 것이니 우리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오늘날 국보가 된 천년사찰 화엄사가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저의 잔이 넘칩니다”
차 경무관은 화엄사 외 5개의 고찰 문화재를 지킨 공로로 경찰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훈장에 추서되었으며(2008), 아산경찰교육원에 2천석 규모의 차일혁 홀이 개관되었고(2009), 지난 6일 현충일행사에서도 차 총경의 이름이 불렸다. 2007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울경찰청에 세워지기로 했지만 새 청장의 취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차 경무관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해방 후, 일제 악질 고등계 형사 사이가 히치로를 저격한 강골일 뿐 아니라, 6·25 당시 빨치산 토벌대장이면서 적과 아군에게 동시에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1974년도엔 비석도 세우지 않았고 1998년도엔 단독 경무관 추서도 정중히 거절했지만 이번에 709명의 거룩한 순직 경찰 영령들과 함께 특진하게 된 것이다. 앞서 가극 [눈물의 여왕] 흥행, 오페라 [카르마], 경찰청 박물관 중앙에 영정이 안장되는 등 대중적, 문화적으로 차 경무관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그 무렵 국가적 차원에서 경무관 추서에 대한 의견이 나온 적이 있다.
이 처럼 정부와 경찰 내부에서 차 경무관에 대한 단독 추서안이 나왔으나 차 회장은 아버지 차 경무관을 대신해 “잔이 넘친다. 아버님은 절대 혼자 추서되실 분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고사해왔다. 차 경무관의 이번 특진으로 경찰은 대외적으로 한층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동안 차 경무관은 문화공연 소재로 꾸준하게 조명되어왔으며, 차 회장은 차 경무관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 [카르마]를 보다 대중적으로 각색하여 국내외 무대에 올릴 예정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