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역사의 제단 위에 던져진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였다”
[특집]‘영원한 퍼스트레이디’ 故육영수 여사 추모38주년
장내는 이내 아수라장으로 돌변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통령을 가로막고 일어선 경호실장이 검은 옷의 괴한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순간 단상 좌석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의 상체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대통령과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성의 목소리가 라디오에 녹음돼 장내의 긴박함은 이렇게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성 : 가만히 계십시오.
대통령 :잡혔나?
남성 : 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해방 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산 국립극장 전무후무한 퍼스트레이디의 총격 사망 사건은 지금은 잊혀 가고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한 장면으로 기록돼 있다.
굵은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던 지난 1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 38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육 여사의 큰 딸이자,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동생인 지만 씨를 비롯해 김종인·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 등 캠프 관계자와 친박계 인사들, 지지자 8000명이 참석했다.
평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박 위원장은 추도식에서 “38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많은 분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은 생전 어머니가 밝은 곳 보다 어두운 곳, 따뜻한 곳보다 추운 곳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어머니 육영수 여사께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제 마음속에도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며 “국민의 삶을 챙기고 나라를 바꾸는데 중심이 돼야 할 정치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정치를 개혁하고 제도화해서 깨끗하고 신뢰받는 정치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다시 한번 굳은 의지를 다졌다.
그런 뒤 “아무리 집이 가난해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게 어머님의 생각이었다”면서 “여성의 근로 여건이 나아지고 일할 수 있는 분야가 현실적으로 넓어질 수 있도록 하는 나라를 만드는 어머님의 꿈이 이제 저의 꿈이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정희 중령의 아내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뵈니까. 그 직감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덥고 소박하고 아주 정겨운 분이세요.”
이는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육영수는 박정희를 만나던 날,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눈에서 빛이 나고, 자신감이 넘치는 믿음직한 모습, 그것이 박정희를 본 첫 느낌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50년 9월 15일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바로 그날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던 날이기도 했다. 육영수가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전쟁통에 부산 영도의 양과자점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약혼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박정희가 군인이라는 점과 그해 26살이었던 딸 육영수보다 8살 많은 이혼남이라는 것이 싫었다.
다음은 전인권 씨가 쓴 박정희 평전의 기록이다.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육영수는 옥천 갑부의 딸이었으나, 박정희는 나이가 8살이 많고,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육영수 아버지 육종관의 표현처럼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없는 군인이었을 뿐이다. 1960년대 이후 군인의 사회적 지위는 많이 높아졌지만 1950년 당시 양반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의 군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또한 박정희가 이제 막 군대에 복직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육종관이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오직 두 사람의 인간적인 교분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두 사람이 맺어진 데에는 아무래도 독특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 나름의 세계를 꾸준히 추구해왔던 육영수의 인생관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육영수의 아버지는 끝내 결혼식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5.16의 서막이 오르고 1951년~1960년까지 육영수의 살림살이는 빡빡한 박정희 일정만큼이나 팍팍했다. 끝난 뒤에도 10년 동안 전쟁이 근무지를 따라 옮겨 다니는 와중에 박정희는 1960년을 맞이했다.
4.19 의거가 일어나던 그 무렵 박정희는 육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보돼 근무지를 부산으로 옮기게 된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그해 6월 15일 내각책임제 헌법이 통과하면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고, 다하지도 못했다. 국민들의 삶은 피폐한 수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고 박정희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1월 9일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집에 젊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평소 박정희가 가까이 하던 장교들이었다. 이날의 회동은 박정희를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한 역사적인 모임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모임에서 신념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첫째, 우리나라는 정치에서 초연해야 할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인과 야합함으로써 정치의 부패를 조장시켰다. 그러한 부패 속에서 권력의 왕좌에 군림하여 군 본래의 숭고한 정신을 더럽힌 자는 단연코 축출하고 악한 요소는 과감하게 일대 수술을 가해야 한다. 둘째, 농어촌의 실정이 비참함이 정치의 부패·무능에 기인한 것임을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정부에서는 날로범람하는 농어촌 고리채 문제만 하더라도 헛구호만 내놓을 뿐, 이렇다 할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과감한 실천을 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셋째, 사회적으로 퇴폐한 풍조가 퍼져 사회 도의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이며, 마치 ‘깡패 왕국’을 이루는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이러한 무법, 불법의 암흑사회는 정치 권력이 불법 폭력단체와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악을 조장해온 결과인 것이다. 이렇게 부조리한 악의 요소가 그대로 이 나라에 풍미하고 있는 이상,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이룩한다는 것은 ‘진흙 속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순수한 우리 애국애족 청년장교들의 단결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군 수사기관에서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지만 모든 책임은 나 한 사람이 지겠으니, 여러분은 맡은 부서별로 열과 성을 다해주길 바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위시한 젊은 장교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해 7월 3일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됐고, 가족들은 신당동 집을 떠나 의장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들의 어머니, 또 다른 부분의 딸이기도 했던 그녀가 이제 온 국민들을 보듬어야 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를 ‘혁명’과 ‘쿠데타’로 바라보는 입장과 정치적 관점에 따라 엇갈리지만 육영수는 군부 최고 권력자의 아내로서 국모의 위치에 올랐어도 근검 절약하는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군정을 끝내고 1962년 8월 30일 전역식을 거행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63년 12월 17일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육영수는 영부인이 된 첫해 이런 글을 남긴다.
“이제 나의 능력, 나의 성의, 그리고 나의 성실을 모든 사람 앞에 마음껏 이용해 달라고 내놓았습니다. 누구나 나를 부를 수 있고 나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여하한 비난의 대상도 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할 국민 여러분의 책임이 새삼 중대함을 나는 느낍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진정 국민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나의 새해에 간절한 소망으로 귀담아 주십시오.”(육영수 저서 ‘나의 간절한 소망은’중에서)
제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던 해 육영수 여사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남편 독재 염려한 청와대의 야당”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게 바로 임자야. 난 청와대 야당이 제일 무서워.” 박정희 대통령은 아내의 한 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며 농을 담아 이런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는 한편, 스스로 본보기가 됐던 육영수 여사.
그녀는 새벽 1시에 잠들어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간신문을 읽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석간신문을 읽었다. 국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을 꼼꼼히 챙기는 한편, 발행이 금지된 신문까지도 관심을 가졌다. 청와대에 입성하고 첫 번째 연말을 맞았을 때 육 여사는 신문을 읽던 중에 한 소녀에 대한 기사를 접한다.
서울 변두리 성동구 응봉동 산 위 동네 판잣집에 사는 모녀가 교과서를 팔아 끓여놓은 국수 한 그릇을 두고 울었다는 보도였다. 육 여사는 이 기사의 주인공을 찾아 직접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경호원 몰래 청와대를 나가 남몰래 어려운 이들의 손목을 잡아주고 격려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육 여사의 가슴은 언제나 인정이 넘쳤고, 자애로 청와대의 야당으로서 시대의 어둠을 어루만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자신의 저서‘동행’에서 “육 여사는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인 듯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살아생전 故육영수 여사는 인정 많고 눈물 많은 퍼스트레이디였다.”
40여년 전 흉탄에 맞아 서울의대 부속병원으로 이송돼 9시간의 사투 끝에 세상을 떠난 육영수 여사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어는 ‘따뜻한 인품’의 자상한 어머니로 남아 있다.
당시 문화방송(MBC) 추모방송 아나운서로 투입됐다던 재미언론인 문무일 씨가 최근 공동 저자로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육 여사가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 박근혜 후보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38년 전 한 사람의 아내로,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조건 없는 사랑과 온정을 아낌없이 국민에게 쏟았던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남편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54년 6월에 쓴 일기에“아내 영수는 내 마음의 어머니”라고 썼을 정도였을까.
공동저자인 이영호 씨는 박 전 대통령 집권시절 청와대 경호원으로 육 여사를 자주뵐 기회가 있었다. 그는 “참으로 인자하고 자애로운 분이셨다.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 식사 한 끼니 사소한 것 하나도 빠트리는 일 없이 오직 나라를 위하며, 헐벗고 굶주린 서민들 걱정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쉬는 일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심지어 이북의 선전단체들도 그 고마움 마음을 모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색을 떠나 육 여사의 생애는 뜻밖의 비극으로 굴곡진 현대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스토리는 역사 속의 감동으로 지금도 생생히 메아리치고 있다.
그녀가 몸소 보여주었던 가슴 뭉클한 교훈들은 힘든 삶에 지쳐 있는 우리 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국민을 보듬어줄 자애로운 어머니 리더십의 롤 모델로 회자되고 있다.
<사진제공=도서출판 행복에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