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3당 합당이 남긴것 2탄-추장들의 나라 ⑧편

“민정당 점거농성,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었다”

2011-05-24     장경우 전 국회의원 

“자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토론을 해보기로 하죠. 앉으십시오!”

우리에게 그 군중속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 100명과 4명이 어떻게 토론을 합니까?”

그쪽에서도 대표단을 구성해서 대표들끼리 토론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저쪽으로 가시죠.”

우리 앞에 드디어 다섯 명의 대표가 왔다.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셋이었는데 나는 그들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가냘프고 어리게만 보이던지. 그 많은 학생들 중에도 유독 대표단으로 온 학생들은 더 나약하고 어려만 보였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여간 진지한게 아니었다.

막상 토론을 하자며 앉았지만 우리는 최루가스 때문에 연신 눈물과 콧물을 흘려대기 바빴다. 그런데 학생들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인지, 아니면 적지 않게 면역이 된 건지 꼿꼿한 자세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일단 각자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소개지 우리가 고심 끝에 부여잡았던 그 ‘지푸라기’들을 늘어놓으며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거의 하소연에 가까운 설득 아닌 설득이었다. 우리들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지금 당장 해결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고 또 이 상황이 계속되어지면 사태가 더 커지니까 일단 대표만 남고 나머지 학생들은 철수하는 게 어떻겠어요?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우리가 당정회의를 통해 충분히 반영하도록 약속할 테니까.”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일단 믿어봐요. 우리는 학생들이 다칠까봐 그게 더 걱정이라니까? 알겠지만 지금 밑에는 학생들보다 몇 십 배는 더 되는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무섭다면 이곳을 점거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저희들은 요구사항이 관철되기 전 까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게 “믿어라”, “못 믿겠다”를 주고받으면서 4~50분간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사안의 긴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평화적으로 그리고 간간히 선후배의 감정도 교환해가면서 그럭저럭 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좋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선에서 이야기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학생들 역시도 당장에 우리와 마주앉아 무슨 해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그 시간에 밑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이것은 분명 인질극으로 비화된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는 것.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학생들에 대한 여당의원들의 시각은 상당히 편협된 것이었고 또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긴장이 고조된 탓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멀쩡하게 내려왔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난데없이 우리가 용감한 사람으로 부추겨 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시 내가 만들어낸 선입견 때문에 빚어진 웃지 못 할 일이였다.

이미 열쇠는 우리 손을 떠난 거나 다름없었다. 집권당 당사를 점거하고 있으니 경찰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학생들의 요구를 당장 해결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날이 컴컴해지기 시작하자 드디어 전투경찰인 ‘특수요원’들이 도착했다. 상황을 파악한 학생들은 유리창에 매달린 채 뛰어내린다고 위협하기 시작했고 건물을 뺑 둘러 그물과 메트리스가 깔려졌다.

특수요원 경찰들은 흡사 유격훈련하듯이 옥상으로 올라가서는 유리창을 특수기계로 들어내놓고 그 안으로 최루탄을 터트리며 진격해 들어갔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유리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다행이 이를 대비해 경찰이 처넣은 그물에 걸려 무사했다. 결국 사태는 짧은 시간안에 진압되었고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어갔다.

손을 머리뒤로 올린 채 줄줄이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그렇게 착잡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연약하고 가냘파 보이기만 하던지….

그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어버린 여당의원으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흡사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투쟁이 비록 과격한 것이었으나 민주화를 위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 희생들에 의해 우리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왔음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또한 이른바 ‘6.3세대’로 한때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나름대로는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서보지도 않았던가. 이제 정치인이 되어 그 현장에서 그들과 대치선에 서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불행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대의 불행이었다.

어쨌거나 그일은 내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처음 맞닥뜨린 시련 중 하나였다.

나름대로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정치를 논하기 이전에 이 땅에서 여당의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동시에 정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나는 끝내 야당정치인이 되고 말았으니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시대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