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비서인 김성열씨가 은밀히 보관해온 ‘이방자 여사 유서’ 본지에 첫 공개

2005-08-23     이석 
광복절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김씨는 서울 평창동 K빌라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유서를 공개했다. 그동안 은밀히 보관해오던 유서를 펼쳐든 김씨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유서는 A4용지 8장 분량으로, 첫머리에 ‘존경하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유서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탄원서 형식으로 작성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鳥之死에 其聲也悲하고 人之死에 其言也善’이라는 맹자의 명언과 함께 시작된 유서에서 이 여사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한일관계는 이것(유서)으로써 끝을 맺는다”고 밝혔다. 나라를 위해 황실 물품을 희사한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그는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인 안춘생 장군을 통해 이왕가의 유품 중에서 독립기념관 또는 안중근의사장학회에서 소망하는 물품이 있으면 희사하겠음을 밝힌바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서의 상당부분 내용은 아들인 이구씨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으로 채워져 있다.

황세손인 이구씨에 대한 이방자 여사의 고뇌가 당시 얼마나 눈물겨웠던가 하는 것을 이 유서가 구구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여사는 유서에서 “고 영친왕 전하의 유일한 적자인 이구는 아직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구는 왕가의 비극을 총체적으로 경험했기에 감당하기는 벅찬 것이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고 전하의 유일한 적자손이고, 전하의 뜻과 혈통을 승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구가 과오를 극복할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말했다.김씨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유서는 지난 82년에 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방자 여사는 미국에서 열린 왕실물품 전시회에 다녀온 후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병원에 입원해 담석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나중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진찰을 받은 결과 대장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이방자 여사와 김씨가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서는 이방자 여사가 얘기하면, 김씨가 받아 적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후 공증 과정을 거쳐 84년 최종적으로 완성됐다. 공증은 당시 ‘반공 검사’로 유명했던 고 오재덕 검사와 선우정원 검사가 직접 섰다. 이방자 여사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가는 도중 김씨는 간간이 고개를 떨구거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유언장 얘기를 하려면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려도 모자랍니다. 설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이 여사가 암으로 투병할 당시 병원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일본 대사가 100만원 상당의 수표와 화환 등을 보내온 게 전부입니다. 그나마 일본 대사의 수표는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습니다.” 김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당시 황세자를 교체하는 문제도 논의했다고 한다. 이구씨와 줄리아 여사의 이혼 문제가 불거진 지난 81년 이후 다른 사람을 양자로 책봉하려 했다는 것이다. . “세간에는 줄리아 여사와의 이혼이 종친회의 압박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이혼은 황세손이 직접 줄리아 여사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이구씨는 아리타라는 일본 무당과 동거 중이었다. 이씨는 이 무당과 결혼할 요량으로 줄리아 여사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줄리아 여사도 변호사를 통해 맞대응을 했다.

물론 소송은 김씨의 중재로 1년2개월여만에 끝이 났다. 그러나 이로 인한 출혈도 적지 않았다. 위자료 명목으로 이방자 여사와 이재형 당시 공화당의장 등이 5,000만원을 모아 줄리아 여사에게 건네줬다는 게 김씨의 귀띔이다. “당시 이 여사는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황세손과의 ‘간도’(부모와 자식간의 연을 끊는 일본식 의식)도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이 과정에서 황세자를 바꾸는 문제도 언급됐었지만, 제가 강하게 반대해 유야무야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이 과정에서 김씨는 양자 문제도 언급을 했다. 그는 “최근 양자 책봉 문제로 황실 후손과 전주이씨 종친회간 불협화음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유서에는 없지만 별도 문서를 통해 이방자 여사의 의중도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도 적당한 때를 봐서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 김성열씨 미니 인터뷰 “줄리아와의 이혼으로 모자간 절연 위기까지 갔다”

현재까지 아리타란 무당의 정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최고 신으로 추앙받는 ‘천조대신’을 자처하는 무당으로 한때 두 사람이 동거관계까지 간 사실 이외에는 좀처럼 알려진 것이 없다. 종친회 일각에서는 이구씨의 사망 이면에 아리타라는 무당이 연관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구씨가 살고 있던 집을 두고 아카사키현에 위치한 호텔까지 와서 생을 마친 것도 바로 이 무당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이 일로 인해 한때 황세손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방자 여사의 비서 김성열씨는 “이혼 소송이 제기될 당시 (이방자 여사는) 모자의 연을 끊는 간도까지도 고려했다. 황세손 대신 새로운 양자를 책봉하자고 언급했다”면서 “그러나 제가 반대해 황세손 교체와 같은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유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모 황실 인사가 언급이 됐다. 현재 별도의 서식을 통해 보관하고 있다”면서 “적당한 때가 되면 이 문서도 공개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분명한 사실은 이방자 여사가 언급한 양자의 이름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지목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양자 문제를 놓고 향후 황실 후손들과 전주이씨 종친회간 갈등이 또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게 종친회 일각의 지적이다.

# 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나?

김성열씨가 21년만에 처음 공개한 유서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형식으로 작성돼 있다. 지난 84년 서울대 병원에서 투병할 당시 작성된 것으로 공증까지 마친 것으로 나타났다. 유서에서 이 여사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한일관계는 이것(유서)으로써 끝을 맺는다”고 밝혔다. 왕실에 대한 그동안의 은원관계를 이 유서를 통해 끝맺겠다는 뜻이다. 나라를 위해 황실 물품을 희사한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그는 유서를 통해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인 안춘생 장군을 통해 이왕가의 유품 중에서 독립기념관 또는 안중근의사장학회에서 소망하는 물품이 있으면 희사하겠음을 밝힌바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당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구씨에 대한 이방자 여사의 고뇌가 당시 얼마나 깊었나를 알 수 있는 단적인 대목이라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구 황세손과는 12살 때부터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친형과도 같이 지냈다. 당시 이방자 여사는 황세손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았다”면서 “이런 생각이 유서에도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